그의 시를 다시 소환하다.
북간도 명동촌 출생이며, 아명은 해환이다.
1936년 광명학원을 거쳐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43년 귀향 직전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그의 시는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작품으로는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쉽게 쓰여진 시> 등 다수가 있으며,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있다.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쓰인 그의 이력-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소년> 중에서-
아! 가을이다. 짙푸른 하늘, 일렁이는 바람결에 뭉게구름이 지난 실구름 사이로 옅은 그의 미소가 떠오른다. 다정한 눈빛, 하얀 미소를 보니 나 또한 슬며시 미소가 새어 나온다.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소년> 중에서-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눈 오는 지도> 중에서-
순이를 향한 애달픔과 그리움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한참 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알게 되었다.
고운 미소로 나를 반하게 하더니, 그에 반해 그는 아주 고통스럽게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한 채 감옥 안에서
비참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다.
그가 쓴 이별의 함박눈은 슬프지만
나는 그 하얀 함박눈이 처절한 고통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상처를 깨끗이 씻겨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중에서-
내 주변에 모든 게 싫어 부정하기만 했던, 자꾸 초라해지는 나 자신마저도...
한없이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죽는 날까지, 모든 것을 사랑하며 부끄럼 없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겠다던
그의 시는.
꿈도 미래도 없던 학창 시절
지난날에 나를 반성하게 하고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겠다고 하는
그의 다짐과 울림이 나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
그가 쓴 <서시>로 인해 나는 '작가'의 꿈을 갖게 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별을 세는 마음으로 언젠가는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그는 나에게 '꿈'이라는 환상을 심어준 그런 사람이었다.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때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
나무 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산림(山林)> 중에서-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잠기고……
…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물결에 잠겼을 게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중에서-
황혼의 쓸쓸함을 아름다운 시로 남기고, 그는 서른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황혼까지 살았다면... 그와 내가 동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잠시 상상에 잠겨 보았다.
눈부신 광복의 희망과 결의의 찬 그는 또 다른 시집을 내고 어느 서점에서 사인회를 열고 있다. 나는 그의 시집 중에 가장 좋아하는 그 시 한쪽에 단풍잎을 사이에 껴 놓은 채, 그 시집을 포근히 안고 그를 마주한다.
“작가님! 저 작가님 시를 너무 좋아해요.
정말 죄송한 부탁인데 지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 하나 낭송해 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단풍잎이 사뿐히 내려앉은 책을 펼쳐 수줍은 표정으로 그에게 보여준다.
그 또한 부끄러워하며 찬찬히 나긋한 어조로 시를 낭송해 주겠지... 하면서...
사과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껍질째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 먹었소.
정이 많고 따스한 사람.
파란 물감을 뿌려 놓은 저 하늘 어디에서 그가 항상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를 향한 내 마음, 저 멀리 아득한 하늘에 있는 그에게도 닿을 수 있을까?
달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伴侶)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
정적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폭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