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내 마음속에
“엄마! 우리 집이 움직여. 안 움직였으면 좋겠어.”
감기 기운으로 일찍 잠이 든 아들은 새벽이 오기 전 쿨럭쿨럭 기침을 하였다.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뜨끈뜨끈 하였다. 아들은 독감에 걸렸다.
나는 아들에게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아들은 정상체온으로 돌아왔고, 나는 작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잠이 들었다.
해가 뜨기 전, 깜깜한 방 안에서 기침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아들의 몸은 뜨거웠다. 나는 아들에게 다시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을 해 주었다.
꾸르륵 잠이 든 아들은 다시 일어나서는 집이 자꾸 흔들린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물수건을 하기 싫다며 칭얼거렸다.
“네가 지금 열이 나고 어지러워서 그래. 이마에 물수건을 해야 집이 안 움직이는 거야.”
나는 아들이 또 기침을 할까? 한쪽 귀를 열어둔 채, 그렇게 뜬눈으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제대로 못 자고, 습관적으로 눈이 떠졌다. 해가 떠 있는 걸 보니 아침이다.
어슴푸레 졸린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켰다.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잠을 깨야만 했다.
나는 ‘브런치스토리’에서 최근 구독한 작가님의 공간에 들어갔다.
시골 아랫목에서 솜이불을 덮고 따듯하게 잠들었던 유년 시절이 떠오르는, 그런 포근한 마음이 드는 작가님의 공간에서 작품 하나를 보았다.
어쩜! 어떻게 나의 상황과 이렇게 같을 수 있지!
어린 시절 엄마를 찾는 어린 시절 작가님의 힘겨운 여정, 비를 홀딱 맞고 밤새 끙끙 앓았을 때 병간호를 해 준 작가님 어머니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또 그 작가님과 딱 맞는 장면은 엄마를 찾는 그 여정이었다.
나도 작가님과 같은 다섯 살 때, 엄마를 애타게 찾았던 그 시절 그때가 떠올랐다.
나는 1980년대 초반, Y대와 E여대 사이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밖을 나가면 민주화 운동을 부르짖는 대학생들의 고성과 그 시위를 진압하려는 부대의 충돌로 외출은 쉽지
않았다.
그날은 주말이었다. 엄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엄마 껌딱지였던 나는 엄마를 졸라서 엄마를 따라나섰다.
엄마 친구네 집에 도착했다. 거기에 엄마 친구들은 각자 자식들을 데리고 왔다.
나는 그 아이들과 밖으로 나갔다.
조금 놀고 나서 한 여자아이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나와서는
“얘들아! 나 엄마한테 100원 받았다. 부럽지? 넌 100원 있어?”
하면서 자랑질을 했다.
당시 100원이면 슈퍼에 가서 과자 하나쯤은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100원을 가지고 나왔다. 100원이 손에 없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나를 흉보기 시작했다. 점점 약이 올랐다.
어린 나이에 그 무슨 자존심이 있었는지, 나도 꼭 100원을 엄마한테 받아서 보여 주고 말 테다.라는 마음으로 엄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엄마 친구 집으로 보이는 그 집에 문을 여니 그곳에 엄마는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 엄마를 찾는 힘겨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내 눈에 보이는 빌라마다 가 보아도 엄마는 거기에 없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는 길을 몰라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미아’가 된 것이다. 나는 ‘엄마’를 연신 부르며 울면서 계속 걸었다.
길가로 나오니 횡단보도가 보였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나도 건너고 멈추면 멈추기를 그렇게 반복했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은 나의 이름과 사는 동네를 물어보았다.
나는 말문이 늦게 트인 탓에 그 당시 나는 그 어떤 대답도 없이 울기만 했다.
사람들은 말을 못 하는 나를 포기한 듯 그렇게 돌아섰다.
그렇게 돌고 돌아 길을 걷고 있었을 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은 세단의 차가 한 대 있었다.
차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상냥한 말투의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엄마 또래의 그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그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는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두 명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부잣집 사모님 같았다.
그 아주머니는 엄마를 잃어버렸구나! 하면서 자기 집에는 딸이 없다고, 나와 같이 살고 싶다고 계속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우리 엄마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차 안이 떠나가라 울었다.
“그래! 우리랑 그렇게 정 같이 살기 싫으면, 너네 엄마 찾아 가!”
차 밖에 내려진 나는 겨우 진정하고 다시 울면서 걷고 또 걸었다.
점심을 먹기 전에 나왔는데, 어느덧 어스름한 저녁이 되었다.
어느 길가에 가로등 아래서 울고 있었을 때였다. 동그란 안경에 제법 나보다 키가 큰 언니가 내 곁에 왔다.
언니는 내가 말을 잘 못하는 것을 알고는 자기 집에 데려갔다.
“엄마. 길가에 우는 아이가 있길래 데려왔어. 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말을 잘 못해.”
“아이 엄마가 많이 찾겠다. 이러지 말고 경찰서에 데려다줘, 그러면 엄마 찾기 쉬울 거야.”
그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동네 경찰서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밥은 먹었니?”
경찰 아저씨는 동그란 보름달 빵을 나에게 주었다. 배가 무척 고프긴 했지만, 너무 많이 울어 훌쩍 거리는 탓에 묵직한 빵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경찰서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서 와락 안겨 펑펑 울었다.
그때 엄마의 품은 그 어떤 날보다 참으로 포근했다. 엄마의 손은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나를 경찰서로 데려다준 그 착한 언니로 인해 나는 보고 싶었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엄마를 찾았다는 기쁨에 당시에는 그 언니에 대한 고마움을 잘 몰랐는데...
한없는 친절과 따스함을 베풀어준 그 언니에게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 역시도 ‘엄마’가 되었다.
다섯 살 아들은 독감을 떨쳐내고 씩씩하게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엄마, 나는 무지개가 되고 싶어. 왜냐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으면 좋겠어.”
‘그래, 엄마도 너랑 누나랑 계속 보면서 앞으로 웃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