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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양연화' 를 보고

by 호수공원

선선함과 스치듯 스산함이 나쁘지 않은 가을이다.

글을 쓰기 시작 하면서부터 사계절이 주는 여운은 그 여느때 보다 짙게 깔려있다.

가을이란 특히 그런 계절이다. 생각을 멈추게 하거나 머물게 하고, 생각을 따라 길을 걷게 되면 길을 잃는 듯 지름길을 두고 한 바퀴를 돌아 도착하게 하는 그런 일들의 일상 속에서

나는 오늘 여기에 머물렀다.


혼자만의 가을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은 날, 나는 문득 ‘화양연화’ 라는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십 여 년전, ‘세상에 이런 사랑도 있구나!’ 하면서 보았던 그 영화.

가을 분위기를 흠뻑 취하게 하는 그 영화를 다시금 꺼내 보았다.



그림01.png <화양연화 (2000년도 작품) 왕기위 감독 / 양조위, 장만옥 주연>



1960년대 홍콩. 첸 부인과 차우는 같은 날 옆집에 이사를 오면서 마주친다.

각자의 배우자가 있는 그들은 부부끼리 만나 친목을 도모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첸 부인은 자신과 똑같은 가방을 차우의 부인이 들고 다니는 것을, 차우의 넥타이는 첸 부인의 남편과 똑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끼리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가까워 진다. 둘은 가까워 질수록 좋아하는 감정도 싹 트지만


“우린 그들과 달라요.” 하며, 비밀스런 우정?을 키워간다.


이 영화는 흔한 러브스토리에 빠지지 않는 애정씬보다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함의 눈빛, 손 끝의 떨림

조심스럽게 서로를 마주 보는 떨림이 두근거리게 하는 영화였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영상과 숨이 멎을 듯한 음악, 그리고 두 주인공의 절제된 연기가 영화를 몰입

하게 한다.


그들의 행복하던 시절도 잠시, 차우는 첸 부인에게


“당신은 남편을 떠날 수 없으니, 내가 떠날게요.”


주변에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의 관계 속에서, 그녀를 위한 결단으로 차우는 싱가포르로 떠난다는 말을 한다.


‘차우! 첸 부인이 남편을 떠올리며 흘렸을 그 눈물은. 그녀의 남편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냐.

차우, 당신을 향한 그 눈물이었다고’

첸 부인은 차우의 품에 기대어 서럽게 운다. 이 장면에서 나도 울컥했다. 좀 슬펐다.


차우는 첸 부인에게 같이 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첸 부인도 같이 가고 싶었으나....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첸 부인은 차우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차우 또한 캄보디아 어느 사원에 있는 구멍이 뚫려 있는 나무에다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 덮어 두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그 어떤 사랑영화보다 더 진한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배우자가 있는 그들은

우리의 사랑은 특별해 하면서 세상에 없을 듯한 절절함과 진한 욕정으로 탐닉하는 그런 영화와는 달랐다.


이루어지지 않는 애틋함은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고, 구멍이 뚫린 나무에게 비밀을 털어 놓으면서 그 비밀을 평생 간직하고 묻는 그 장면은 참 아름다웠다.


내가 만약 여주인공이었다면...?


문득 지난 주말의 일이 생각이 났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끌고 아이들과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는 중. 수산물 시장이 내 눈에 들어 왔다.

평소 해산물을 싫어하는 남편이지만, 아들이 바다 동물을 좋아하기에 나는 남편에게 졸랐다.


“우리 결혼하기 전에 같이 세발낙지. 산낙지 먹었었잖아. 노량진에서. 기억 안나?”


남편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 미안해...”


남편 전에 만났던 남친과의 일을 남편과의 기억으로 편집하다니...남편은 새로운 놀림감이 생겨 신나 하였다. 남편은 그날 이후부터 나를 '세발낙지'라 부르고 있다.


내가 영화 속 여주인공이 되는 일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임을 깨달으며,

정말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나는 멋쩍은 마음에 창밖을 보았다.

예쁜 옷을 입은 단풍들이 나의 마음도 물들인다.


오늘은 가을 햇살이 따스하다.

잠시라도 추워지기 전, 하늘에서 주는 선물처럼 그 따스함이 내 곁을 맴돌고 있다.


가을은... 사랑하고 싶은 그런 계절이다.


가을을 타는 감성으로 듣는 노래가 있다.


‘나는 기도해요. 사랑이 우스운 나이까지...단숨에 흘러가길...

....다시 헤어져도 나는 또 그대겠죠...’


인연이란 소용돌이 속에 돌고 돌아

첸부인과 차우... 그들의 사랑이 떳떳해진다면, 하늘이 허락해준다면...

그 사랑이 이루어 꼭 이루어 지기를...


그림22.jpg <화양연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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