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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 Feb 12. 2019

05. 보리차에 대한 환상

책방에 앉아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으니 귀한 눈이 내린다.

곧 비로 바뀌겠지 했던 예상과 달리 가벼이 모여 흩날리는 눈발을 보자 나갈 일이 없는 마음이 차분해지며 오늘 장사는 포기다.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오랜만에 난로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작은 주전자를 올린다.

물이 끓으면 보리를 넣어야지.

난로에 불을 보자니 생각에도 없던 아이스 라테를 마시게 되었다. 뭔가 난로를 믿고 추위에 맞서 싸우는 기분이랄까.

이왕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거, 보리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지. 나의 자질구레함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뒤 이렇게나 수다쟁이가 되었다. 스스로에겐 좋은 일이다.


물을 사 먹는 시대인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우리 주위엔 주전자에 끓인 보리차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마시던 보리차의 습관은 정말 습관으로 굳어져 신혼 생활에 당연하게 필요했던 것도 커다란 은색 빛의 주전자 구입이었다.

갓 끓인 따뜻하고 고소한 보리차를 마시는 습관은 정수기의 온수 물이 밍밍하게 느껴져 쉬이 넘어가지 않게 만들었고 늘 집에선 마시고 싶을 때 준비되어 있는 보리차의 번거로움엔 관심도 없던 때라 앞으로도 밖에서 파는 생수처럼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바닥을 보일 때쯤 큰 주전자를 씻어 물을 받아 끓이고 보리차를 넣고 걸러내는 작업은 무척이나 귀찮은 작업이었고 편리함을 찾는 나 같은 동물은 결국 여름에는 마트에 가 생수를 몇 통 씩 사 와 때 되면 먹기에 이르렀고 그 편리함의 감각은 온몸에 남아 여름엔 물을 사 먹는 것도 현명한 방법 중에 하나지 하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어느 기대 없이 들어간 식당에서 손때가 묻은 탁자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얼 먹을지 고민할 때 가져다주는 그 김이 모락 올라오는 한 잔의 보리차에 온 몸이 녹아버려 역시 들어오길 잘했어.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름에는 어떤가. 물방울이 맺혀 차디찬 물통에서 나오는 그 시원한 보리차란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컵에 부으며 마셔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 주인장은 무척이나 세심한 사람이라는 멋대로 상상하는 추측까지 더해져 어느샌가 보리차를 주는 식당에 대한 나의 환상은 나의 기분까지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다.

난로 위에서 허연 김을 뿜는 주전자, 그 안에서 끓는 보리의 향, 여름에는 팔팔 끓는 주전자를 식탁에 올려놓고 식기를 기다리다 얼음을 넣고 보고 싶은 일드를 보며 노곤한 낮을 보내며 소소한 행복을 쌓아간다.

습관은 무섭다. 밍숭 한 생수 보단 물도 건강하게 마시라며 늘 끓여놓는 부모의 밑에서 자란 나는 아침에 바닥을 보인 주전자를 씻어 물을 끓이고 보리를 채우는 그 시간을 아주 단순하지만 정갈한 마음이 되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루틴화 하길 좋아하는 나는 그렇게 아침에 먼저 일어나 차가워진 보리차를 데운다.

미지근한 보리차를 좋아하는 유리컵을 꺼내 마시고 그리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나와 눈 맞추는 아이에게 건넨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속에선 부담스럽지 않은 온도의 물이 흐르는 게 느껴지고 점심 메뉴를 생각한다.

편안한 파자마 차림 위에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부엌에 서서 유리컵에 든 보리차를 바라본다. 우연히 만난 식당에서 주는 그 하얀색의 가벼운 무게 감안에 들어간 보리차, 급식소 소독 열로 더해진 스테인리스 컵에 든 보리차를 급하게 마시며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좀 더 놀기 위해 애를 쓰고 보리차에 길들여진 딸아이는 똑같은 색의 물을 의심 없이 마시다 생소한 맛에 놀라 인상을 쓰며 뱉는 모습까지,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같은 물건에도 다른 추억이 덧대어져 옥수수, 결명자, 말린 무까지 많은 우린 물을 마셔보았지만 나는 이 보리차에 대한 추억과 환상이 많다. 여름에는 잠시 생수에게 나를 기대지만 어느 순간 더운 열기가 가고 바람의 온도가 변할 때 즈음 그리고 더욱 바람이 차고 계절이 완연히 바뀔 때쯤 다시 너를 꺼내고 큰 주전자를 꺼내며 시간의 흐름을 느껴본다.


내리는 눈에 조용한 책방을 보낼 테지만 정성스레 책 포장을 하고 기분 좋게 받을 이들을 상상한다.

모든 일에는 언제나 정성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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