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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Sep 17. 2018

완벽한 건 불행한 겁니다. 내려놓으세요.

#내가 불행한 이유

인생을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모 내게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여유를 좀 가져보세요."


그들의 눈에 내가 얼마나 안쓰럽게 보이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안타까움만 할까?


나는 어느 순간엔가 삶의 이유도 기쁨도 모른 채 숨이 쉬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살고 있었다. 목표도 희망도 없는 삶은 공허했다.  그저 아등바등...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목적을 잃은 무가치한 분노가 사소한 순간에 터져 나왔다. 분노는 작은 자극에도 화염처럼 번져 니와 내 사람들을 까맣게 태웠다. 나의 화냄을 수도꼭지에 비유해준 사람도 있었다. ' 너는 화가 나면 밸브를 잠그지 못하고 모든 물을 다 쏟아내는 것 같아.' 그래. 그의 말이 맞다. 나의 화는 마치 오작동을 일으키는 자동 수도꼭지처럼 작은 자극이 마음에 어른거리기만 해도 급격히 반응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내가 위협받으면 참을 수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나의 자존감이 조금이라도 위협받으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음이 너무 쪼그라들어서 사소한 문제가 나의  세상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어있었다. 하루는 농담 한 마디에 죽자고 연인을 몰아붙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도 가시로 느껴졌던 순간 나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게 됐다.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화를 내던 괴물의 그림자가 걷히자 초라한 내가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연민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아등바등하고 살았을까? 나는 어쩌다 이렇게 불안과 분노로 삶을 채우게 됐을까? 어쩌다 내 어깨에 놓인 짐이 너무 가벼워 다 내버리고 싶어 져 버렸을까? 


내 지난 순간이 안타까웠다. 아주 어린 시절 엄마, 아빠와 떨어져 할머니 댁에서 지내면서 온몸으로 불안 해 하던 내가 보였다. 친구들을 깨물어 버리고 사과하지 않겠노라 떼쓰던 내가 보였다. 낯선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이가 보였다.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라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보였다. 자기가 생각 하기에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야하는 당찼던 소녀도 보였고, 결국 그 모습으로 상처받아 울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로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 애쓰던 학생도 보였다. 지난날의 안타까운 내가 보였다. 그저 안타까운 내가 거기 있었다.


내가 만약 그 순간으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많은 순간의 나를 만나고 싶다.


불안해하던 나를 안아주고 싶다. 모든 것이 낯설던 내게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혼자 울던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고 싶다.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고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 때론 도망치는 법도 알려주고 싶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지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알려주고 싶다. 그냥 다 해주고 싶다.


그럼 나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까?


지난날의 나는 다시 만날 수 없으니 나는 계속 불행할까?


나는 불행이란 단어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게 두렵다. 이 불행이 끝나지 않을까 봐..


그러나 나는 이 불행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안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으면서도 모든 걸 붙들고 있기 때문에 불행하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그 기대에 부응했다는 마음이 나를 가치 있게 만드니까.


내 지나온 시간이 만들어온 기준이란 것에 미치지 못하면 나는 잘못된 거니까.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추고 싶다. 이 불행을 끝내고 싶다. 


아니. 끝내야만 한다. 살기 위해서.


삶은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루어야만 하는 절대적인 가치도 없다. 그것을 위해 애쓸 필요는 더욱 없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하냐. 내가 기쁘냐. 내가 웃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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