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0일 둘레길 3-2구간을 걸었다. 집을 나설 때는 눈발이 만만하여 우산만 챙겼는데 고덕역에 내려 산자락을 오를 때는 얼마나 드센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이젠을 지참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서설(瑞雪)이다 생각하고 무작정 걸었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純白)의 경관도, 생각이 고상해져서도 좋았다. 무한정 좋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펑펑 내리는 눈 때문인지 은백(銀白)의 경물(景物) 때문인지 감정이 고조되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읽었던 김진섭의 백설부도 생각이 났고 잠삼, 백거이, 소동파의 눈에 대한 시도 떠올랐다.
그래도 유종원의 “강설(江雪)”이 먼저 읊조려졌다.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
만경인종멸(萬徑人蹤滅)
고주사립옹(孤舟蓑笠翁)
독조한강설(獨釣寒江雪)
산이란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에는 사람 종적 없는데
외로운 배 도롱이 걸친 노인
찬강에 낚시를 하네
번역을 하니 시의 깊은 맛이 반감됩니다마는 이 얼마다 아름다운 한 폭의 수묵화인가.
온 세계는 눈꽃으로 덮여있고 사위(四圍)는 고요한데 함박눈을 맞으며 홀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어부,
명리(命理)를 초월한 은자(隱者)의 모습이다. 참으로 낭만적이요 상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각련의 앞글자를 따서 읽으면 천만고독이 된다.
이 시인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극한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된다.
단 스무 개의 글자 중 다섯 글자가
끊을절(絶), 멸할멸(滅), 외로울고(孤), 홀로독(獨), 찰한(寒),
절대격리(絶對隔離)와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글자이다.
눈 내리는 강의 어옹(漁翁)은 시인 자신이기도 독자 자신이 되기도 한다.
이 짤막한 스무자 속에 켜켜이 감정과 생각이 서려 있다.
그래서 만고(萬古) 절창(絶唱)이라 하나 보다.
나는 은퇴 후에는 이 시처럼 절대고독(絶對孤獨)을 느껴봐야지 하는 생각이 많았다. 어옹(漁翁)처럼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낚시를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우주로 향해 비상(飛上)하는 그런 삶을 꿈꾸어 왔다. 어옹이나 강태공이 낚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심성을, 득도(得道) 수준의 내공을 낚는 것이라는 생각에 매료되어 왔다. 또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절대고독의 경지는 어디까지일까?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하였다.
아무나 엄두를 못 내는 절대경지는 적막강산이나 절해고도에 가야만 이루어지고 그래야만 이런 비범한 생활이 내게도 현실로 이어질 것인가. 문명의 이기(利器)와 인간관계를 절연(絶緣)하면 멀지 않은 곳에서도 절대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저 생각에만 그치고 이대로 세월만 보낼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네 시간 산행이 지루하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가벼운 걸음이었다.
이튿날 조간신문에는 이십 년 만에 대설(大雪)이라고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