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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 시절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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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목영 Oct 14. 2024

복사꽃 오얏꽃 피는 밤에

  나날이 새로운 감동을 가져오는 나의 은퇴 생활은 대모산의 여름 수목처럼 푸르고 힘차다. 구룡산 기슭의 녹음을 스쳐오는 신선하고 향기로운 바람은 나의 오수(午睡)를 부추긴다. 지난날 치열했던 삶의 기억들을 바람이 모조리 휩쓸어간다. 헛헛하다. 그리고 행복하다.

내가 대학을 마칠 때의 사회적 거대한 담론은 조국 근대화, 경제개발, 수출 보국이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곳곳에서 들렸고 개발도상국 진입이라는 표어가 붙어있어 젊은이들을 고무시켰다. 나라가 가난했다. 그래서 우리도 가난했다. 국기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복창하며 조국 근대화에 매진하자는 대통령의 담화는 내 가슴을 벅차게 했고 나를 희생했어라도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결심은 나의 피 끓는 청춘의 좋은 시절을 옴짝달싹 못하게 일 속으로 몰아갔고 그 속에서 녹아서 조국 근대화의 밀알이 되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었다. 


영어성적이 우수하고 해외 근무에 적합한 건강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종합상사 수출부에 배속되었다. 수출부의 대부분 동료들은 나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국가관도 삶에 대한 정체성도 비슷했고 소통도 원활했다. 나는 동기생 및 선임자들과 함께 이천 명이 넘는 공장 일감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잦은 해외 출장과 생산, 선적 때까지의 제반 사항을 관리해야 했다. 머리는 온통 긴장과 책임감으로 차 있었다. 벅찬 일인 것은 분명했지만 오히려 성취감에 투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미국 세 도시와 유럽 두 국가를 일 주 만에 방문상담을 했다는 얘기며 회사에서 잔무를 정리하다 보니 먼동이 텄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일은 전문성과 완벽성을 요하는 것들이라 놀 때도 쉴 때도 두뇌는 일속으로 매몰되어 갔고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며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강박적 행동이 무의식 상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 중독의 전 단계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성취감에서 오는 단순 현상으로 좋게만 생각들 했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조국 근대화와 엘리트라는 두 이름을 잠재의식 속에 부여받았고 그 이념 속으로 서서히 세뇌되어 갔다. 이 빛나는 이름하에 수출전선이라는 전장에 투입된 우리는 자랑스런 투사였으며 목표 달성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뛰어난 젊은이들이었다. 새(혀) 빠지게 일을 했다. 환경이 바뀌었어도 직업이 바뀌었어도 일로부터의 강박관념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어 무지막지하게 애를 써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둠이 오면 그림자는 스스로 사라지니 그 어둠은 길고 긴 세월이었다. 세월은 세뇌와 일 중독의 처방전이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사회와 조국의 현실을 받아들였고 빠르게 동화되어 갔으며 그 위에 희망을 건설해 나갔다. 희망의 결정체인 창업도 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수혜를 받았다고 믿고 싶다. 나의 창업은 내가 종속된 회사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과중한 업무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즐거움으로 벅찼었다. 젊음과 낭만을 창업과 바꾼 셈인지는 알 수 없다. 동기생 두 명과 나는 각자의 사랑에도 열정적이었고 헌신적이었다. 데이트가 있는 날이면 열 일을 제쳐두고 일찍 퇴근했고 잔무(殘務)는 남은 두 사람의 자발적 품앗이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우리 청춘사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얘기도 도란도란 나누었다. 지고지순의 사랑을 인생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나는 일과 사랑이 상충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조율했다. 오래도록 뜨거운 사랑은 젊음의 끈기였으며 숨 가쁘게 무겁던 세월은 사랑의 힘에 슬기롭게 극복되었다고 생각된다.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노래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들었다고 기억한다. 퇴폐적이고 비생산적이라 도외시했다. 내가 세상을 관조할 나이가 되어서야 얼마나 깊은 철학과 삶의 진리가 내포된 노랫말인지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반 마디의 노랫말이 수십 장의 글보다 울림이 컸다. 젊어 놀아야 한다. 젊음의 감흥과 열정으로 젊음을 불태워야 한다. 인생은 그리 길지도 않을뿐더러 젊음은 더더욱 길지 않더라.

요즈음 회자되는 워라밸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젊은이들의 예지력에 감탄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워라밸은 일과 삶의 조화와 균형을 말한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니 응당 즐겨야 하며 일은 즐기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일 뿐이다. 일이 삶의 주체가 되면 후회만 남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 좀 더 할 걸 아쉬워하면서 임종(臨終)을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다.

새벽에 잠이 깨면 가끔 회한이 들 때가 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부질없는 강박에 사로잡혀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내 삶이 다시 주어진다면 일 중독에서 벗어나 별빛을 받으며 걸어보리라. 흘러가는 강물에 발도 담가보고 꽃 피는 날이면 보고 싶은 사람에게 불시에 만나자 할 것이다. 복사꽃 오얏꽃 피는 밤에 친구를 불러 주연도 베풀 것이다. 천삼백 년 전에 이백 같은 시인은 젊은 나이에 삶의 진리를 꿰뚫어 볼 줄 알았다. 얼마나 통찰력 있는 시인이요 철학자인가. 옛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밤놀이하며 인생을 즐겼다는 춘야연도리원서를 읽으면 감개와 마주쳐서 눈물이 난다. 


  젊어서는 일로 세월을 허송했고 지금은 바람을 쏘이려 햇볕을 쪼이려 세월을 허송한다.

이래저래 내 인생은 세월을 허송하느라 바쁘다.  



 - 워라밸 : work-life balance

 - 이백 : 당나라 시인

 - 춘야연도리원서:이백의 시집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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