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님, 사랑이 뭐예요?
어느 날, 우리 팀 인턴이 장난스럽게 던진 질문이었다.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상황은 정 반대로 흘러갔다. 누군가는 과거 연애담을 풀기 시작했고, 또 누군가는 나름의 철학을 펼치기 시작했으니까. 각자 생각한 사랑의 대상은 각양각색이었다. 배우자, 애인, 자식, 반려동물, 반려식물, 일까지. 나는 뭐라고 대답하지? 망설이던 사이에 내 머리보다 입이 먼저 나가 버렸다.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나이도 먹을 대로 다 먹었는데, 사랑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게 창피하긴 했다. 사랑을 정의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어떤 모양의 사랑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지, 사랑을 잘 받아내는 사람인지… 하나의 단어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데, 그 어떤 것에도 답할 자신이 없었다. 하는 수 없지, 가슴에 정답이 없다면 머리로 채우는 수밖에. 그렇게 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연인 간의 애정, 가족의 조건 없는 지지, 친구와의 따뜻한 유대 등등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이름을 부르며 세상 따스하게 안아주던 그, 언제 찾아가도 따스한 밥을 차려주는 할머니, 어떤 감정도 다 나누는 내 친구. 오늘은 친구가 선물한 운동화를 신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중이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다 보니, 이런 게 행복인가 싶다. 나는 늘 사랑하며 살고 있었네. 이번에는 두 번째 정의를 살펴보았다.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아니, 이것도 사랑이야?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돌아보면 나는 일상에 지칠 때마다 혼자 훌쩍 떠났다. 그래도 현지 사람들이 친절히 챙겨준 덕분에 언제나 마음 곳간이 두둑이 채워진 상태로 여행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사랑일까.
치앙마이 빠이는 특히 사랑이 넘치는 도시였다.
온천을 보러 가겠다고 바쁘게 움직였던 그날, 도착하자마자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건기라 온천이 말라버렸어요.”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앉을 데도 없고, 다시 숙소에 돌아가자니 짜증이 났다. 그늘에 늘어져 자는 저 강아지가 상전이로세. 그 옆에 엉덩이 한 짝을 겨우 걸치고 앉아 땀을 식혔다. 나처럼 허탕 친 사람이 열댓 명은 되어 보였다. 그래도 오토바이가 있으니 다행이지, 나 같은 뚜벅이는 절망뿐이다.
‘혹시 나 태워줄 수 있어?’라고 물어볼까 싶지만, INFP 인간에게는 무리였다. 차라리 땡볕을 걸어가는 게 편하겠어. 그나마 숲내음 맡으면서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자연, 당신을 행복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이 첩첩산중에 가게가 보였다.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물이라도 사 마셔야지. 얼마라도 상관없다고.
‘저기요, 음료수 한 잔만 주세요 (제발요)‘
누가 보아도 술집이 분명한 이 집은 대낮이라 그런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어쩌다 아침에 오픈한 것일까. 사연이 어찌 되었든지 내 알 바 아니다.
목표는 오직 물이었으니까.
또다시 인기척 내기를 몇 번째, 주인이 저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왔다. 하늘 높이 파인애플처럼 질끈 묶은 뽀글 머리, 머리카락처럼 긴 수염, 길고 긴 속눈썹. 사람 한 번 좋아 보인다.
그는 꼬질꼬질한 나를 보더니 세상 호탕하게 웃었다.
“온천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가 보네. 걸어가느라고 고생 꽤 했겠어. 일단 얼음물부터 마셔.”
그는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다가 몇 년 전에 빠이로 이주했단다. 맛있는 술과 좋은 음악, 흥이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복작대며 살고 싶었다나. 그리고 그 길로 여기에 술집을 차렸다.
가게 안에는 그만의 개성이 진득이 묻어났다.
해먹에도 테이블에도 벽에도 그의 붓질이 살아있고, 그가 읽은 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본인이 만든 소품도 한 두 개가 아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스토리 천지로 보였다.
뒷마당에 있는 방갈로 숙소는 어찌나 예쁜지, 더 이상 운영 안 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팬데믹 전에는 늘 예약이 차 있었다고 하던데, 별빛 아래에서 신나게 춤추며 밤이 새도록 파티를 즐기지 않았을까. 하루만 있어도 모두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이 공간을 어떻게 2주 만에 설계했냐고 물어보았더니 ‘태국 사람들은 산에도 바다 근처에도 다 알아서 집 짓고 사는 능력이 있거든.’ 라며 알쏭달쏭하게 대답했다. 공사장 담당자와 이야기 나누는 모습, 하나씩 공간이 완성되는 과정, 그리고 새참을 먹는 순간까지, 그 시절의 기록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2주는 어떤 의미였을까.
물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했던 나는 어느새 주인장 매력에 스며들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얼음물에 맥주에 과자에 얼마나 먹어 치웠지. 비용은 받지도 않았다.
그 대신 애정이 어린 잔소리를 던졌을 뿐이다.
담배도 안 피고
마약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하고
이건 뭐 거의 스님이랑 다를 바가 없네.
인생을 조금 더 재밌게 살아봐.
우린 그럴 의무가 있어.
낯선 사람에게 시간도 물도 잔소리도 내어준 그 마음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나는 술이라도 팔아주고 싶어서 한 번 더 찾아갔다. 이번에는 닫혀 있었다. 내가 귀신에 홀린 걸까. 그래도 괜찮다, 덕분에 어떤 여행지보다 특별한 기억이 되었으니까.
사랑은 꼭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한밤중에 숙소까지 걸어가는 나를 오토바이로 태워다 준 이름 모를 현지인, 가게에 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로 꽉 채워서 내어주던 레게바 주인장, 본인이 작곡한 노래를 연주해 주었던 영국 소녀까지, 태국 치앙마이 빠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곳에서 받은 친절이 문득 떠오른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사랑을 꿈꾸냐고 물으면 가까운 관계의 사랑은 밥처럼, 낯선 이들과 교감하는 사랑은 디저트처럼 꾸준히 수집하고 싶다고 할 테다. 그것이 때로는 여행의 경험을 완전히 바꾸어 주기도 하니까.
“혼자 여행 가면 심심하지 않아?”
라고 묻는 친구들에게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일단 말부터 걸어.
그게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