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부고 기사를 써오세요.
몇 달 전, 독서 모임에서 받은 과제였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받은 과제 중 가장 어려웠다. 펜을 들었지만,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내 나이는 어느덧 마흔. 인생의 절반 즈음을 지나가고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 전부 막막했다. 스무 살에 품었던 꿈은 다 어디 갔을까. 어떤 친구들은 승진에 결혼에 육아 소식을 종종 공유하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이 모든 막막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템플스테이로 도망치듯 떠나 버렸다. 그때는 몰랐다, 이곳에 죽음 체험관이 있을 줄이라곤.
어서 와, 저승은 처음이지?
대원사 티베트 박물관 지하에서는 죽음 전시가 한창이었다. 제목은 ‘어서 와, 저승은 처음이지?' 종을 치면 저승에 입국 신고가 된단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지만, 나는 손이 가지 않았다. 신이 내가 온 걸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 평가도 하지 못한 채, 실수로 부자로 환생시켜 주면 좋겠고.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본 건 염라대왕 부인의 조각상이었다. 기괴한 생김새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꿈에서라도 나올까 무서웠다.
뒤편 거울에는 섬뜩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당신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선다면, 살아생전 지은 죄가 여기에 낱낱이 보일 것입니다.' 저승에서는 거울조차 함부로 볼 수 없구나.
양쪽 병풍에는 지옥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중 가장 오래 본 그림은 발설지옥이었다. 누군가에게 말로 상처를 준 사람이 간다는 곳. 친구에게, 가족에게, 동료에게 했던 말들이 지나갔다. 생각 없이 던진 농담, 화가 나서 쏘아댄 가시 돋친 말, 상대를 무시했던 순간. 모두 발설지옥 입장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연습하는 장례식
이어진 장례식 체험관에서는 숨이 턱 막혔다. 죽음은 더 이상 상상이 아니었다.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내 얼굴에는 검은 리본이 붙어 있었다. 이것이 영정 사진이 되는 건가. 어쩐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미리 쓰는 유언장 역시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아니, 볼펜을 쥘 자신도 없었다. 몇 달 전 부고 기사 숙제 앞에서 쩔쩔맸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 떠올랐다, 아직 해보지 못한 것들이. 여행 에세이 작가가 되고 싶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마다가스카르 바오바브나무 아래에서 일몰도 봤어야 하는데. '언젠가 해야지'라고 생각만 하면서 사라지기에는 억울했다.
기회는 지금 이 순간뿐
죽은 뒤엔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 산 정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볼 수도,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도, 달달한 과일을 맛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일단 사랑하는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커피 향이 좋았던 오후, 친구와의 진솔한 대화, 마음을 움직이는 공연 — 이런 순간을 일부러라도 더 많이 만들어내야겠다. 미루고 있던 브런치 북 연재도 시작했다, 에세이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만 할 수는 없으니까. 읽는 사람이 없더라도 일단 쓰는 거다, 내 자신을 위해서. 이왕 주어진 삶, 최대한 만끽해 볼 테다.
내 인생의 끝을 생각해 본 사람만이
지금 현재의 중요함을 알고
진지하게 만들어 간다.
이제야 티베트 박물관에서 본 문장의 의미를 알겠다. 여기서 발견한 건 죽음이 아니라 새롭게 깨어난 나 자신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대신, 원하는 인생을 빚어가는 것. 이보다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다 포기하고 싶어진 순간에도 이곳에서의 기억이 나를 붙잡아주리라 믿는다.
대원사 템플스테이 — 만 마흔 살의 사춘기를 끝내준, 가장 의미 있는 생일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