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시작된 호기심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영화 한 편을 발견했다. —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전력도, 배관도 멈추고, 배 안이 온통 오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재난보다 ‘크루즈 여행’ 그 자체에 가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타볼 수 있을까? 바다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기분은 어떨까?
너희, 크루즈 타러 갈래?
그 답은 생각보다 빨리 찾았다. 어느 날, 작은 아빠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 “너희, 크루즈 타러 갈래?” 세상에 이렇게 설레는 문장이 있을까. 그는 해양업계 베테랑이자 크루즈 마니아였다. 수차례 배를 탄 그가, 이번에는 우리도 데려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부산 앞바다를 오가는 원나잇 상품이라니, 별 부담도 없었다. 동생과 나는 망설임 없이, 곧장 부산행 표를 예매했다.
이토록 즐거웠던 하루
승선 터미널은 작은 국제공항 같았다. 운항사별 부스가 줄지어 있었고, 입국 신고서도 이곳저곳에 비치돼 있었다. 보딩을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내 또래는 거의 없었다. 혹시 크루즈는 바다를 달리는 관광버스일까.
객실 문을 열자, 침대와 냉장고, 룸서비스까지 갖춘 아늑한 호텔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른들만 모인 자리에 온 듯한 불안은 금세 사라졌다. 짐을 내려두고, 바를 향해서 달려갔다.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오늘은 이 분위기에 녹아들고 싶었다. 바텐더가 내 취향을 물어보더니, 달달한 칵테일을 내밀었다. 창밖에는 빗방울이 맺히고, 안에서는 재즈가 흘렀다.
이 순간을 사진처럼 담아 두었다가, 언젠가 꺼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슬 배가 고파질 즈음, 뷔페가 열렸다. 한식, 중식, 양식, 디저트까지 — 도대체 이 많은 재료를 어떻게 배에 실어 온 걸까. 한 술 뜨자마자, 맛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식사를 마치자, 곧이어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크루즈 세계에 입성한 우리를 환영해 주기라도 하듯, 내 머리 위로 수십 개의 폭죽이 터졌다. 멀찍이 올려다보아야 하는 축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빛과 울림이 온몸에 스며들어, 심장이 쿵쿵 울리는 정도였다.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짧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다시 배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식당이던 공간이 공연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삼층 건물이 테마파크처럼 시시각각 변신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했다. 그나저나 가수가 나올 리는 없고, 누가 공연을 하려나. 그때 낯익은 얼굴이 무대에 등장했다. 뷔페 음식을 채워주던 필리핀 승무원이었다. 식당에서는 그렇게 수줍어 보이더니, 지금 당장 음악방송에 나가도 손색없는 비트박스 실력을 선보였다. 관객 호응을 끌어내는 솜씨도 수준급이었다. 다음 무대는 체크인을 도와주던 승무원. 트로트를 어찌나 맛깔스럽게 부르는지, 객석이 들썩였다.
포차가 열린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배 안이 심심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우리는 곧장 달려갔다. 낮에는 텅 비어 있던 공간에 식탁이 줄지어 놓이고, 승무원들은 분주히 요리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주문하느라 바빴다. 메뉴는 곰장어, 통닭, 떡볶이. “곰장어 3인분 남았어요!” — 판매 상황을 알려준 덕분에 때맞춰 주문할 수 있었다. 저녁을 잔뜩 먹었는데, 잘만 들어갔다.
우리가 먹고 노는 사이, 색소폰 연주자가 재즈를 불어넣었다. 아저씨, 아줌마들은 신나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바다 위를 달리는 노래방이었다.
주위는 암흑처럼 어두웠지만, 저 멀리 광안대교 불빛이 잔잔히 흔들렸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 작은 아빠에게 건배를 올렸다. 오늘따라 소주가 달았다.
실컷 놀았더니, 온몸이 노곤해질 때까지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싶어졌다. 때마침 배에 목욕탕이 있었다. 탕 안에 상체를 반 즈음 담근 채, 창 너머 부산 바다를 구경했다. 샤워기는 1분마다 버튼을 눌러야 물이 나왔다. 물이 부족해서 이렇게 만들었나 보다. 문득 내가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갑자기 시원한 라면 국물이 떠올랐다. 배 안 편의점에 가봤다. 멀미하는 사람을 위한 위생 봉투, 밤새 놀고 싶은 사람을 위한 게임류, 사발면과 각종 햇반류. 마른 반찬에 김까지 판매하고 있으니, 안 살 수 없었다. 동생과 나는 신라면을 하나씩 끓였다. 안개 낀 선상에서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맛은 평소와 같았지만, 그날의 공기와 바다 냄새 덕분에 잊을 수 없는 한 끼가 되었다.
나만의 퍼즐을 찾아서
라면 그릇을 분리수거하는데, 동생이 물었다. 크루즈 승무원 재밌어 보이지 않냐고. 크루즈 학과 재학생이 이곳에서 실습한다는 소식이 내심 부러운 눈치였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크루즈는 호텔과 비슷한 서비스 업종이지만, 바다 위에서는 모든 게 다르다. 날씨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 한정된 자원, 그리고 매일 밤 이어지는 파티.
여행 업계에서 일하고 싶다면, 크리에이터, 프리랜서 가이드, 여행사 취업 중에서만 골라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깨달았다. 아직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조각이 많다는 걸. 평생을 다 쏟아부어도 그 모든 조각을 경험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는 조각부터 모아서, 나만의 인생 퍼즐을 만들기로. 퍼즐 조각 중 하나는 특별한 체험을 소개하는 크리에이터다. 누구나 쉽게 도전하는 맛집 큐레이션을 넘어, ‘이런 것도 있단 말이야?’ 감탄을 부르는 체험만 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작은 아빠가 나를 크루즈에 초대해 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 잘할 수 있을지,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로는 자신 있지만, 영상은 상상도 못 하겠다.
여전히 막막한 것 투성이지만, 오늘의 경험을 이 에세이에라도 담아 보았다. 그리고 버킷리스트를 하나 더 추가해 두었다 — 장기 크루즈 여행 가기. 그때는 초대장을 건네볼 테다.
“우리, 크루즈 타러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