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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쓰는 사람이 되었다

by 은손


내가 백억 천억 부자가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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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마르지 않는 부자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분명한 답이 떠올랐다 — 여행. 낯선 도시에서 다양한 삶을 가까이 관찰하는 시간은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전 지구에는 80억 인구와 200여 개국이 존재하지만, 내가 직접 살아본 나라는 고작 한국뿐이다. 나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더라도, 구경은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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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계속 여행하기만 하면, 나는 완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세상을 떠돌며 놀 순 있겠지만, 돌아갈 보금자리가 없다면 공허할 것 같았다. 나는 시작과 끝이 있는 여행을 원했다. 이를테면 몇 달간 스리랑카 전역을 일주하고, 한국에서 숨을 고른 뒤 다시 유랑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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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전히 빠진 조각이 있었다. 바로 여행 기록이었다. 글이나 영상 형태로 경험을 소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완전한 여행이 될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내 창작물을 소비하며, ”나도 저기에 여행 가고 싶다“ 느낀다면, 그보다 보람된 일은 없으리라.


네곰보

내가 꿈꾸는 건 여행자가 아닌, 여행작가였던 것일까. 여행을 통해서 내가 작가로 살아갈 수 있을지, 직접 실험하고 싶었다. 기사를 요청받은 후에 움직이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나는 아직 아무도 찾지 않는 지망생일 뿐이다.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내 취재는 내가 만들면 되니까. 이왕이면 아직 사람들이 많이 가보지 않았던 나라를 탐험하고 싶은 마음에, 스리랑카에 갔다.


여행 목표는 단순했다, 매일 기록할 것.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몇 줄이라도 기록하고 싶었다. 아니, 여행작가는 그래야 했다. 돌아와서는 반드시 가공된 형태로 세상과 공유할 것, 바로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결과물을 낼 수 있어야 여행 작가의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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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운 목표는 세 가지였다.

- 브런치북 10편 이상 연재하기

- 영상 조회수 1만 달성하기

- 제휴 마케팅으로 수익 내기


스리랑카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현지인의 제안을 따라다녔다. 네곰보에서는 호텔 스태프가 제안한 사찰에 갔고, 엘라에서는 아유르베다 병원 내부를 구경했다. 인터넷 정보가 아닌, 사람이 건네준 이야기가 내 여행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목표는 반만 달성했다. 영상은 2개밖에 만들지 못했고, 조회수는 3천 수준이었다. 장면과 장면을 잇는 호흡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상을 자연스럽게 편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반면 글쓰기는 달랐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막막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부터 꺼내니 쉬워졌다. 이 순간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도록 묘사하는데 신경을 썼다. 이 글이 한 편 두 편 모여서 브런치 북이 되었다. 제목은 ”뭐? 스리랑카?” 내가 스리랑카에 가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당황스러워했던 순간을 위트 있게 담았다. 숙소나 이심 정보는 네이버에 올렸고, 제휴 마케팅 수익은 10만 원을 넘었다. 소소한 성취였지만 뿌듯했다.


어느새 글쓰기는 주간 루틴이 되었다. 무엇이든 금방 포기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50여 편이나 등록했다. 브런치 북 메인에 글이 소개되었던 날, ‘뜨는 브런치 북’ 1위에 오른 날, “글을 읽으면서 네곰보 수산시장을 동행하는 기분이었어요!” 댓글을 받았던 날까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물론 모든 글이 많은 공감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 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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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여행 덕분에 여행을 글로 짓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낮에는 열심히 동네를 산책하고, 저녁에는 글과 사진을 정리하는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오히려 더 충만했다. 이 시간이 쌓여, 언젠가 책을 출간할 수 있겠지. 써보고 싶은 주제도 점점 더 늘어났다 — 전 세계 섬만 기록하는 여행기, 각국의 축제를 따라다닌 여정, 한국 지방 소도시 기행.


브런치 공모전에도 도전했다. 예전처럼 대충 제출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준비했다. 수상의 영광을 안을 수 있다면, 그래서 출간까지 수월하게 흘러갈 수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출판사가 나에게 관심을 보일지 아닐지 알 순 없지만, 나는 이미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 내 글이 누군가의 여행 가방을 열게 될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나는 펜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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