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그림을 그린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다. 나에게 있어 그림 그리기는 학창 시절 정규 수업에 배운 미술이 전부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기도 어려운데 직접 그려보게 되다니, 나에게 이런 놀라움은 번호 따라 색칠하기다. 번호가 매겨진 색깔을 칠하면 그림이 완성된다. 딸아이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싫어했지만 가끔 색칠하기를 고르면 사주곤 했다. 얼마 전 딸과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사러 갔는데 페인팅 그림을 고른다. 그림을 보니 명화다. 좁쌀만 한 번호가 빼곡하다. 나는 눈을 감고 그림을 상상하니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안으로 번호를 찾아 색칠하기가 부담스러웠다. 머릿속 상상은 이미 책값과 그림값을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젤 앞에서 그림 그리는 친구도 부러웠고 미술 선생님도 멋져 보였다. 이제야 기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참 야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구매였을까? 가느다란 붓 세 벌, 유화 물감, 캔버스 그림을 바라만 봤다. 아침이면 커피잔을 들고 촘촘히 박힌 번호를 유심히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낭독을 시작하고부터 커피 마실 때는 낭독 파일을 듣는다. 낭독을 들을 때 나는 풍요로워진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어느 순간 손엔 붓이 들려 있었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번호 따라 색칠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혜정 낭독연구소 카페에 올라온 선생님들의 파일을 들으면서 그림 앞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색깔이 채워지고 조금씩 그림이 드러나면서 그림이 텍스트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케치된 번호에 초독을 하고 모양에 따라 형태가 드러나자 작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텍스트의 생각과 감정은 빛에 따라 명암으로 드러나고 색깔의 명도와 채도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 잡힌 말 하기가 된다. 언어의 표현 방식은 말소리이고 내용은 그것이 전달하는 의미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미는 텍스트가 된다. 텍스트를 전달하는 것은 언어의 표현 방식인 말소리이다.
말소리의 생성과정은 말을 하기 위해서 들이마신 공기를 폐에서 내보내야 한다. 폐에서 나온 공기인 기류는 목을 통과한 후 입안의 구강이나 코의 비강을 지나며 여러 가지 말소리로 변한다. 기류가 조음 기관을 통과할 때 각 조음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에 따라 말소리도 달라진다. 우리 얼굴에 있는 입술, 치조, 경구개, 연구개, 혀 목젖, 성문이 우리의 소리를 만들어 준다. 발음과 발성을 잘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텍스트를 읽고 내 몸의 소리와 발음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가족에게 내 파일을 자랑스럽게 들려주며 당당하게 피드백을 요청했다. 성년이 된 아이들은 직장 생활로 바쁘다며 매일 듣는 목소리를 또 듣냐며 손사래를 쳤다. 딸은 못 이기는 척 파일을 듣고 나서 말한다. " 엄마, 피드백이니까 잘 들어주세요. " 엄마, 낭독은 목에서 나와 목소리가 갈라져 어미가 뚝 떨어지고 먹는 소리예요. "아들이 말한다. " 엄마, 소리가 전체적으로 무거워요. "라는 피드백을 한다. 물론 아이들은 처음보다 소리가 일정해졌고 소리도 좋아졌어요. 엄마가 낭독할 때 행복해 보이고 생기가 넘쳐 보기 좋다고 말한 아이들은 엄마에게 진심 어린 피드백을 한 것이다. 청자의 귀는 참 솔직하구나라는 생각은 나의 행동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침에 눈을 뜨고 녹음하고 잠들기 전까지 파일을 듣고 또 들었다. 열심히 하면 되겠지 했던 나의 패턴이 무산되었던 것은 내 소리가 없어졌다고 느꼈을 때다.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도 내 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잘하려는 강박은 몸과 마음의 활동을 위축시켰고 긴장은 더 많은 긴장을 불러왔다.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일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갔거나 유치원 졸업반 정도 보이는 두 아이와 엄마로 보인다.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었고 버스를 내리기 위해 아이는 태그를 찍는 중이었다. 테크 처리가 되지 않았다. 아이는 버스에 남았고 엄마는 버스 밖에서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엄마를 바라보다가 시무룩해져서 얼굴을 들지 않고 테크에 집중한다. 당황했지만 진중한 모습이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아이는 무사히 엄마 곁으로 갔다. 버스는 출발했고 버스 안에 남았던 친구 엄마가 아이와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들렸다. "철이가 태그가 안돼 무척 당황했을 것 같아"라고 친구 엄마가 말하자 친구도 "철이가 많이 속상했겠다." 그 소리를 듣는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켜보고 있는 나는 응원을 보내고 있었고 엄마가 되어 칭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모습에 말이다. 버스에서 내린 아이에게 보채거나 핀잔을 주었다면 나도 아팠을 것 같았다. 아이를 기다린 엄마는 감정을 읽어주고 사용법을 한 번 더 알려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이였고 엄마가 되어 아이를 사회인으로 성장시키고 보니 의사소통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의사소통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나 뜻이 서로 통하는 것이다. 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전 감정과 감각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온전한 자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상황과 인식을 감정과 감각으로 느끼고 살아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낭독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낭독은 작가가 쓴 텍스트의 생각과 감정을 청자에게 들려주는 과정이다. 듣는 사람이 있기에 읽는 사람이 있다. 작가의 혼신을 청자가 알 수 있도록 소통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가 없어야 텍스트가 살아나는 낭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