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당신이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캡틴 마블>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어벤저스> 시리즈를 보고 나면 늘 궁금했던 것. 그래서 블랙 위도우 솔로 무비는 대체 언제 나와? 어벤저스가 무려 4편까지 나오고 흑인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블랙 팬서>가 나왔는데도 여전히 여성 히어로가 주인공인 마블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인종 문제와 여성 문제에서 어떤 우선순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여성의 이야기는 '다음 순서'로 밀려났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논의는 ‘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는’ 취급을 당해왔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캡틴 마블>이 등장했다. 혜성 같이.
개봉 전 불매 논쟁이 무색할 만큼 <캡틴 마블>의 흥행은 순조롭다. (누군가의 말처럼 불매의 뜻이 ‘불꽃 예매’였던 모양이다.) 그만큼 영화의 리뷰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데, 대부분은 캐롤과 고양이를 찬양하는 내용이었지만 가끔씩 영화의 아쉬운 점을 언급하는 글도 있었다. 주로 ‘캐롤이 히어로가 된 당위성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는데,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캐롤은 우연한 기회로 힘을 얻고, 그 이후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이 당연하게 히어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삼촌의 죽음 뒤 각성하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 애국심과 열정과 끈기로 슈퍼 솔저가 된 스티븐 로저스(캡틴 아메리카) 등등과 다르다. 이는 얄팍하고 게으른 서사다.’ 나는 이 주장에 반박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캐롤의 인생 전체가 계기다
지금까지의 히어로 영화들이 평범한 인간이 일정 계기로 각성하여 영웅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면, <캡틴 마블>은 거꾸로 이미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다가 자신이 원래 누구인지 깨닫고 나서 슈퍼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다. 그러니 캐롤이 히어로가 된 계기를 묻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크리족 전사였던 비어스는 욘-로그(주드 로)에게 힘을 억누르고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는 세뇌를 당해왔다. 인간 중에서도 여성이었던 캐롤은 유아용 자동차를 탔을 때도, 공군 파일럿 훈련을 받을 때도 ‘너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1990년대이지만 2019년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냉대와 멸시 속에 밀쳐진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마침내 ‘캡틴 마블’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치듯 몇 장면이 나올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캐롤의 삶은 평가절하 되어왔다. 너는 할 수 없다고, 너무 감정적이라고, 미쳤다고, 나서지 말라고, 여자가 자기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세상은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항상 통제된 채로 싸워왔지.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캐롤은 말 그대로 무적과 같은 힘을 보여준다. 타고난 선한 의지와 후천적으로 얻은 강한 힘이 비로소 제대로 만난 것이다. 후반부에 그가 폭주하는 부분이 언뜻 유치하거나 과해 보일 수 있지만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수없이 들어야 했던 '너는 할 수 없다'는 말을 깨부술 정도로 충분히 강해야 했을 테니까. (함선의 '벽'을 가차없이 부수는 장면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슈퍼 히어로가 되는 것 말고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캐롤의 인생 전체가 그가 히어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당위다.
이 삶을 모르는 당신에게
내게는 애국심이나 공명심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영웅이 되는 사람의 이야기가 훨씬 더 납득이 가는 서사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넘어진 캐롤이 두 주먹을 꽉 쥐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울컥하지 않을 여자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캐롤은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거의 ‘여성’이라는 성 그 자체처럼 보인다. 여자들이라면 모두 그 순간을 안다. 과거에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앞으로 겪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에 공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이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웃지 않았다고 사과문을 쓰고,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고, 밤에 함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성관계에 동의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이미 한 번쯤은 몰카에 찍혔을 것이라고 반 정도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영화에 대한 불만 중에서 퓨리 국장이 다소 우스운 캐릭터로 전락한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도 보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영화를 보고서 고작 퓨리 국장의 캐릭터 붕괴를 걱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일까. 갑자기 인생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영웅 서사가 빈약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캐롤 댄버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여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당신의 세계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인생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에 대해. 몰랐겠지만, 지금까지 여자들은 그렇게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