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역사를 잔잔한 동화로 그려낸 소설책
좋은 책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먼저 이 책을 인상깊게 읽은 분들이 추천해준 덕분에 나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읽은 소설책이다.
일본에게 식민 지배를 받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위안부에 끌려가게 되었던 주인공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던 여러 인물들의 슬픈 이야기를 동화처럼 그려낸 소설책이다.
처음에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톡, 톡톡.
풀잎 끝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하나둘 터집니다.
목을 축인 새끼 제비가 파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작은 두 발로 수면을 힘껏 박차 오릅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나레이터가 내용과 상황을 설명할 때, "~한다", "~했다."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은 너무 공손하고, 조금 부담스러운 정도로 예의를 갖추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 차인표의 배우로서의 모습과 방송에서 보았던 반듯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첫번째 챕터가 지나고, 더이상 문체가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도 익숙해진 것 같다. 어쩌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이야기의 힘도 좋았고, 무엇보다 차인표 작가가 묘사를 정말 잘한다고 감탄하면서 읽었다. 상황에 대한 묘사, 배경에 대한 묘사, 들꽃과 자연에 대한 묘사, 마음이 움직이는 모습에 대한 묘사 등. 소설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 그 시대의 상황과 배경이 그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 주인공이 무사히 탈출하기를 바라며 마지막까지 읽었다. 하지만 작가는 슬픈 역사를 마음대로 바꿔놓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쓰러져가고 짓밟혔던 분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를 물어간 백호에 대한 복수심으로 평생을 살았다. 백호를 만나서 복수를 해야 증오심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증오심 덕분에 남자 주인공은 더 강인한 모습으로 성장했지만, 보이지 않은 백호를 찾아 산을 헤매며 너무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혼자 참지 말아야 할 아픈 일들을, 혼자 참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그냥 참아 내느라 얼마나 힘에 겨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순이는 그런 용이가 너무 가엾습니다.
"용이야, 이제 그만 백호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
용이가 다시 침묵합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용이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커다란 손이 지금보다 더 커지더라도, 긴 엽총이 더 강력해지고 칼날이 더 매서워지더라도, 자신은 결코 백호를 잡을 수 없으리란 것을 말입니다. 어린 기억 속에 버티고 있는 백호는 어떤 총과 칼로도 잡을 수 없는 신기루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난 네가 백호를 용서해 주면, 엄마별을 볼 수 있게 될것 같아."
용이가 가엽고 안타까워, 순이가 말합니다.
"모르겠어. 용서를 ...... 어떻게 하는 건지."
용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용서'라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백호를 잡아 복수하겠다던 용이가 변한 걸까요? 아니면 홀로 지낸 세월에 지친 걸까요?
"상대가 빌지도 않은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띄엄띄엄 말을 잇는 용이의 얼굴이 깊은 외로움을 머금고 있습니다.
"용서는 백호가 용서를 빌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엄마별 때문에 하는 거야. 엄마별이 너무 보고 싶으니까. 엄마가 너무 소중하니까."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소재로 소설을 쓰면서 용서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상대방이 용서를 빌었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을 용서해주고, 마음에서 떠나보낸다는 의미에서 용서는 용기있는 결단이다.
작가가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10년 동안 마음 속에 품어왔던 이야기를 다듬으면서 지인 찬스를 사용했다고 털어놓았다. 초고를 작성해서, 국어 선생님을 하셨던 장모님에게 처음 원고를 보내드려서 첨삭을 받았다. 10년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탈고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에게 원고를 보내드리면서 조언을 받았다. 가정이 정말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작가에게 해주신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인표야,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재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거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오랜 배우 경험이 있고, 책을 좋아하는 다독가여서 묘사하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어머니의 조언이 큰 울림이 있었던 것 같다. 자유롭게 상상하되, 사실을 근거로 한 상상력을 추구하면서 철저하게 연구하고 신중하게 표현하려고 했던것 같다. 그리고 순이 할머니처럼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분들에게 이 소설을 바치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