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3대 성지, 3000개가 넘는 불탑이 숲처럼 펼쳐진 신의 땅, 미얀마 첫 통일왕국의 수도 등 ‘바간'을 수식하는 말은 많아. 첫 통일왕국의 수도란 점에서, 또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경주'와도 비슷해. 오직 바간만을 여행하기 위해 미얀마를 찾는 이도 많고 그게 아니라도 미얀마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하는 곳이야. 하지만 난 이곳을 도착한지 하루 만에 짐을 싸고 있어. 정확히는 오늘 새벽 3시에 도착해 조금 전 새벽 1시 버스를 예약했으니 24시간이 채 안돼서 이곳을 떠나게 됐어. 여행은 늘 선택의 연속이고,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내가 잘 한 건지 의심이 들지만 지금은 이게 맞다고 생각해.
인레에서 다음 여행지를 고를 때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어. 한곳이 지금 있는 ‘바간'이었고 다른 한 곳은 카친 주에 있는 ‘미치나'였어.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미치나를 포기한 건 너무 위험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야. 미얀마에서 여전히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고, 카친은 그중에서도 가장 내전이 빈번한 곳이거든. 요 몇년 전쟁은 멈췄지만 카친독립군과 정부군은 여전히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미얀마에서 가장 큰 난민촌도 카친 주에 있어. 솔직히 난 미치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 '내가 그곳 사람들을 찍는다면?’이란 생각은 날 흥분시키거든. 하지만 흥분과 호기심만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니까. 설령 내가 내전이나 난민들을 찍을 수 있다 해도 '그다음은?’이란 물음에 난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런 지역에서 사진을 찍는 건 위험한 만큼 멋진 일이지만 적어도 사명감이나 의무, 그게 아니면 어떤 작은 이유라도 있어야 할텐데 내겐 그런 게 없어. 만약 지금 수영이 네가 내 곁에 있다면 이렇게 내 얘기를 길게 하는 것보다 네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거야. 하지만 난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고 늘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해. 새벽 1시 버스를 타고 만달레이를 거쳐 미치나로 갈 예정이야.
오늘 여행 이야기를 먼저 할게. 여행하는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 바간은 워낙 넓고 유물이 도시 곳곳에 퍼져 있어서 걸어서 여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그래서 작은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다녔는데 이곳은 다른 미얀마 지역과는 달랐어. 흙먼지 날리는 도로나 작고 요란한 간판, 줄지어 걷는 승려, 도로를 가득 메운 낡은 트럭 행렬 같은 건 다른 미얀마 지역에서 보던 장면과 비슷했지만 내가 찍는 사람- 그들은 너무나 달랐어. 이건 숙소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꼈는데 직원이 내게 인사를 하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똑같이 웃고 똑같이 상냥한 말투로 얘기했지만 난 그가 참 불친절하다고 느껴졌어. 새벽에 도착해 피곤한 탓인가 하고 넘겼는데 날이 밝고선 그게 아닌 걸 알게 됐어. 우리가 인도 여행을 했을 때 거리에서 수많은 걸인을 만났었잖아. 'Give me the money’를 외치는 아이들 무리도 어딜 가나 꼭 있었고. 하지만 미얀마 여행을 하면서 폐품 줍는 아이는 봤어도 구걸하는 아이를 만난 적은 없거든. 근데 오늘 숙소 밖을 나가자마자 그런 아이들에게 둘러싸였어. 그게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오토바이를 타고 다른 파고다에 갈 때마다 내리면 그런 아이들이 있었고 그런 마주침이 나로선 너무 괴로운 일이었어. 만약 여기가 인도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거야. 거긴 걸인, 사기꾼, 땡중이 여행상품인 곳이니까. 하지만 내가 경험한 미얀마는 그런 곳이 아니었고 그래서 더 충격이 컸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저렇게 된 건 결국 ‘여행자들’ 때문이잖아. 누군가는 저 아이들에게 돈을 줬을 테고, 아이들은 자신의 연약하고, 사랑스럽고, 불쌍한 모습을 이용해서 쉽게 돈 버는 법을 터득한거지. 사실 이곳에서 만난 어른들 역시 비슷해. 아주 작은 파고다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사진 찍은 값을 내라는 거야. 내가 그에게 "너 정식 직원이야?” 물으니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예스 예스"만 반복했어. 점심을 먹은 음식점에선 시킬 때와 먹고 난 뒤 음식값이 달랐고, 이때 역시 주인은 음흉하게 웃으며 넘기려 했어.
이곳을 떠나야겠다 마음먹은 건 오후 끝 무렵에 일이었어. 난 한 불탑을 둘러보고 좀 쉬어야겠다 싶어서 작은 슈퍼 앞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있었거든. 근데 한 여자가 다가와서 네 카메라를 보더니 "우와 네 카메라 좋아 보인다!” 말하면서 혹시 자기 아이를 찍어줄 수 있냐 묻더라고. 뭔가 좀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사진 찍는 일이니 따라갔어. 거기엔 정말로 아이가 있었어. 빨간 옷을 입은 아이가 집 앞 계단에 담요를 깔고 곤히 자고 있었어. 새근거리며 자는 아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니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녹아내리더라. 정말 그랬어. 마음이 정화되는 게 느껴졌거든. 난 조용히 아이 사진 몇 장을 찍고 엄마에게 "정말 예쁜 아이야. 아이가 건강하게 컸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줬어. 아이 엄마도 그 말을 들으며 행복해했고. 내가 "근데 이 사진을 어떻게 보내줄까? 너 이메일 있어?”라고 물으니 엄마는 “안 보내줘도 돼. 대신 돈을 줘.”라고 했어.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웃고 있었는데 그 미소는 오늘 내가 만난 이들의 그것과 같았어.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오는데 바간엔 정말 불탑이 많더라. 하지만 내겐 그 많은 불탑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아마 내가 찍고 싶은 건 이런 유물이 아니라 사람인 것 같아. 그것도 진심으로 웃는 사람 말이야. 사실 내가 능글맞다, 음흉하다, 낯설다고 표현한 이들의 미소는 내가 한국에서 자주 보던 거야. 솔직히 그건 내가 짓던 표정이기도 해. 나 역시 억지로 웃은 적이 많으니까. 하지만 미얀마를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미소는 달랐어. 거기엔 미소 이외엔 다른 뜻이 없었어. 맑은 물가에 가면 물속에 바위도 보이고, 물고기가 지나다니는 게 보이는 것처럼, 미얀마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마음속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난 그런 미소를 볼 때마다 사진이 찍고 싶어지는 거고. 어쩌면 난 그들의 미소가 부러워서 더 열심히 찍는 건지도 몰라. 바간에서 하루 이틀 더 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내일도 모레도 이런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면 그건 내게 큰 문제거든. 그래서 미치나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어. 거기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아직 모르지만 말이야. 아 그리고 오늘 세 가지 소원 중 첫번째 소원을 정했어. 나도 진심으로 웃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내 걸음을 멈추게 하고, 오래 바라보게 하는 그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웃고 싶어. 수영이 네가 내 웃는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 네가 돌아왔을 때 내 얼굴이 낯설지 않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