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탄들의 습관이라는 아침 일기 한번 시작해 보지.
일본 TBS방송국에서 'KAL 기를 폭파한 김현희'를 다룬 다큐의 일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어제 현장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김현희와 김승일이 호텔에서 한국대사관에게 문을 열어주며 몇 마디 나누는 장면이었다.
대사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김현희는 이불속으로 숨고 문을 열어주며 김승일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도우조… 코레와 무스메노 마유미데스'
(얘는 제 딸 마유미입니다.)
그다음 문장은 딸이 피곤해서 잠들었다뿐였다.
그런데 오후 10시에 시작된 이 대사가 새벽 4시까지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고레와..무..스메, 무..무스메노.., 죄송합니다.'
'5분 쉬었다 가시죠.'
김승일 역을 맡은 배우는 공포에 젖은 듯 몸을 떨고 있었다.
한번 미끄러져 버린 입은 좀체 풀릴 생각을 하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패닉 상태까지 도달했다.
어떤 일이든 스텝이 꼬이기 전에 풀지 않으면 아무리 베테랑일지라도 패닉까지 갈 수 있다.
슛이 돌아가면 카메라부터 모두가 얼어붙은 그에게 집중된다.
촬영을 내일로 미룰 수도 배역을 지금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그 짧은 시간에 능숙하게 저 문장들을 해내야 한다.
촬영 종료 예정 시간을 한창 넘기고 있었고 모두가 돌아가지 못하고 김승일만 바라보고 있다.
아, 능숙하게 할 필요도 없고 저 몇 문장을 그냥 읽으라는데, 이젠 그것 조차 이제 되질 않는다.
도저히 도망갈 곳도 없다.
카메라 앞에서 조명받는 멋진 일이 그 스텝이 깨져버리면 이토록 공포스러울 수 있을까.
명백히는 그 두 문장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그가 이유였기에, 너무도 명백했기에
그는 거듭 고개 숙여 사죄하듯 사과만 한다.
그런데 이거 잔인하다.
한국과 일본, 네 명의 피디와 얼어붙은 단역.
친절하지 않은, 아니 감정을 억누르고 있지만 이내 새어 나오는
PD들의 지시는 지켜보는 나조차도 힘들게 만들었다.
이 심리의 극한을 보는 모든 사람들 조차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어제 이 날 선 촬영 현장을 보며 리더의 역할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김승일은 언제 어디서부터 그렇게 꼬여버린 걸까.
과연 본인의 역을 제시간에 수행해내지 못한 김승일만이 원이였을까,
리더들은 본인들의 속도만으로 나아가는 것이 타당했을까.
리더의 선택으로 구성된 팀원이라면 목표점까지 잠재력을 발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어제뿐만일까, 또 다른 얼어붙은 김승일이 나올 것이다.
어제 같이 촬영 현장에서 대기를 해야하는 상황에 있다 보면 지루함이 발작같이 온다.
뇌랑 다리 근육이 간지러운 느낌이다.
(성인ADHD검사도 받아보았지만 지극히 정상이라고 한다.)
그런 순간이 오면 순간적으로 강도 높은 운동을 하고 어려운 글을 아무거나 들고 읽는다.
멍하니 유튜브를 보고 있는 남자친구를 뒤흔든다.
"어떻게 그러고만 있어? 나 뇌가 가려워. 긁어줘. 뭐라도 어려운 말을 해봐."
촬영 현장을 가면 카메라 기준 전후로 극한의 긴장감과 느슨함이 공존한다.
조명을 받는 몇을 제하곤 대부분의 제작진들도 그 장시간을 멍하니 흘려보내는 듯하다.
앉아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보더콜리가 생각났다.
개들은 보통 일정량의 신체 활동을 통해 에너지를 해소해야 만족도가 높고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보더콜리는 좀 다르다.
전에 보더콜리와 함께 사는 한 반려인이 보더콜리가 자신의 발길을 계속 막아 세워 고민이라고 방송에 나온 적이 있다.
전문가에 따르면 종마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다른데,
보통의 개들은 주기적인 산책과 같은 단순 활동만으로도 에너지가 해소 되어 만족할 수 있지만
보더콜리는 두뇌와 신체 에너지를 각각 배출해 줘야 만족할 수 있다고 한다.
더욱이 보더콜리는 단순한 신체 활동보다도 어떤 무리 떼들을 공을 굴리듯 방향을 몰아붙이는 걸 즐긴다.
그래서 양치기 개로 보더콜리가 많이 보인다는 것.
도시에서 살아가는 보더콜리라면,
이런 욕구 해소를 위해 매일 일정량의 신체 활동과 두뇌를 쓸 수 있는 게임 활동을 함께 해줘야 한다고 한다.
나는 어쩌면 보더콜리 같은 종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종종 몰려오는 이 발작 같은 지루함은 해소해야 할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지 못해서겠지.
유익하지만 참, 피곤한 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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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도구에서 타이탄들의 루틴 중 '아침 글쓰기'를 시작해 보았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뜨면 간밤의 꿈부터 많은 문장들이 떠올랐었지만
그런 '잡생각'들을 기록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 생각해 흘려보내왔다.
아침 일기를 쓰는 일이 도움이 된다니 되려 더 신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