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하나. 아주 어리지도, 그렇다고 매우 능숙하지도 않은 그런 나이. 나는 벌써 세 번의 퇴사를 하였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수많은 고민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아무런 계획 없이 회사를 뛰쳐나오게, 아니 도망치게 되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회전목마처럼 반복되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래 포기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거늘. 그래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아왔거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어째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방랑자로 변해버렸는가.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그 이유를,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물음표였다.
답을 찾는다는 기대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궁금해졌다. 내가 기대하는 것에 대한 결론이 과연 있을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가 될 수는 없는지에 대해서. 그래서 어느 때와 같이 떠나기로 결정한다.
분기별로 오는 제주도
만만하다. 그렇다고 귀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코시국 덕분에 최근 제주도를 참 많이도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여행을 하고 싶었다. 조용하고, 땀 흘리고, 사색할 수 있는 여행지.
이미 유명한 올레길이 아닌 한라산 둘레길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여행지 중 최적인 곳이라고 확신했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나는 정말 한라산과 인연이 없었다는 부분이었다. 이미 과거 두 차례나 백록담을 시도했지만 가지 못했던 터라 '설마 이번에도?'와 같은 괜한 걱정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엔 일주일 일정이다. 둘레길, 윗세오름, 백록담아 다 기다려라.
종이 항공권이 좋다.
많은 부분이 디지털화되며 이제는 항공권도 모바일로 발권하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그 옛날부터 공항에 와 수화물을 부치고 종이 항공권을 발급받던 그 설렘이 가슴속에 남아있다. 버리지 않고 잘 간직한다면 언젠가 주머니에서 깜짝 튀어나와 여행했던 순간의 설렘을 되찾아 줄지도.
아주 작은 존재
가는 동안 잠을 청하고 싶지만 여행의 설렘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피곤함을 조금 미루어둔다. 덕분에 비행기에서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연히 본 창 밖에는 광활한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등산을 좋아하게 된 지 어언 3년 차. 저 산 하나를 오르고, 그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땀을 흘린다. 가도 가도 끝날 것 같지 않던 높디높은 저 산이 하늘에서 바라보니 왜 이리 작고 귀여운지. 아주 작은 저 산을 더 작은 '나'라는 존재가 오르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니. 이유 모를 웃음이 피식 나온다.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바라보는 것, 비행기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이다. 더 넓게 더 많이 보기 위해 땀을 흘려 산을 오르지만 비행기는 그 선물을 아주 쉽게 준다. 그렇다고 산에 오르는 것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산에 오르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더 힘겹게 얻은 것 일수록 더 가치 있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왔다. 또 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만 다시 한번 기대해보고 싶다. 이 여행이, 이 시간이 나에게 또 어떤 생각을 가져다줄지 혹은 다른 인생의 방향으로 이끌어 줄지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