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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Mar 16. 2019

아버지의 유품

버버리 트렌치코트

가끔 옷장에서 꺼내 손질하고 통풍만 했지, 정작 아버지가 입은 모습을 본 건 대여섯 번에 지나지 않았다. 동생 고등학교 졸업식과 사촌 누이 결혼식, 그리고 친목회에서 주최한 행사에 입고 간 정도였다. 왜 구매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모르긴 해도 무척 비쌌을 테고,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내 차지가 되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졸린 눈을 비비며 주말의 명화를 보던 때가 있었다. 그중에서 ‘카사블랑카’는 남자라면 한 번은 꼭 봐야 할 영화라고 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어디 아픈 사람처럼 내내 인상을 쓰고 화장실에 갈 때조차 심각했다. 아버지가 감탄해 마지않던, 트렌치코트로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중절모를 눌러쓴 험프리 보가트의 우수에 찬 눈빛은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원체 말 없는 사람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은 영화 속 대사보다 말이 많았다. 영화를 보는 건지, 침으로 샤워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카사블랑카의 뜻이 하얀 집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영화가 끝나고 아버지는 부스스 일어나 코트를 꺼내 입었다. 아버지는 험프리 보가트처럼 담배를 피웠고, 험프리 보가트처럼 말했다. 나는 어렸지만 아버지가 결코 험프리 보가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어머니가 ‘잉그리드 버그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머리가 큰 뒤에 ‘영웅본색’에 나오는 주윤발을 보고 아버지의 코트를 몰래 꺼냈다. 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상관없었다. 험프리 보가트가 트렌치코트를 바짝 동여맸다면 주윤발은 풀어헤쳤다. 세상의 트렌드는 옥죄는 것으로부터 해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주윤발처럼 담배를 꼬나물고, 주윤발처럼 총질을 했다. 친구와 호수로 물을 뿌리면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마당을 굴러다녔다. 비둘기를 대신해 만약에 닭이라도 있었으면 마땅히 하늘로 날렸을 것이다. 엄마한테 걸리고 아빠에게 쥐어터지기 전까지 나는 동네를 주름잡는 날건달이었다. 그날, 매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건 드디어 남자가 되었다는 증거였다. 우수와 고독, 비와 담배, 사랑과 우정이 내 안에서 꿈틀꿈틀 자라났다.     


나는 트렌치코트를 입어보고 나서 왜 아버지가 옷장 안에만 박아두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뭄에 콩 나 듯 있긴 하지만 한국인이 트렌치코트가 어울리기는 쉽지 않다. 어느 정도 부피가 되어야 맵시가 사는데, 그렇지 못하다. 키가 크면 덩치가 안되고, 키와 덩치가 되어도 비율에서 어긋난다. 체코의 한 버스 정류장에 있는 벤치에서, 독일의 한 공중 화장실 변기에서, 발이 닿지 않는 경험을 한 뒤로 나는 내 체형이 평균 이하인 것을 알았다. 심지어 암스테르담에서는 자전거를 빌리려다 내게 맞는 사이즈가 어린이용뿐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믿기 힘들지만, 네덜란드 성인(남녀 포함)의 평균 키가 180을 넘는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에 빠트렸다. 


하지만 체형이 전부는 아니다. 더 큰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북촌이나 인사동, 삼청동 주변을 거닐다 보면 한복 입은 외국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어째서 외국인에게는 한복이 어울리지 않을까,였다. 한 번도 한복이 어울리는 외국인을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가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스트리트 패션쇼가 골목마다 펼쳐진다. 더러 어울리는 무리가 있어 눈길을 주면 영락없이 한국인이다. 비슷한 체형인 중국과 일본인도 어울리지 않는다. 한복은 청바지가 아니다. 격식을 갖춰 입는 복식이라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화장실을 한 번 가려고 해도 절차가 복잡하다. 실용성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옷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의 차이가 옷의 맵시를 결정하는 것 같다. 대개의 나라가 그렇듯, 한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옷에 대한 특유의 정서가 있다. 기모노의 다소곳함은 한복의 우아함과 다르다. 우리 옷이 더 뛰어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옷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에게 고유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트렌치코트에는 전쟁의 정서가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참호에서 입는 옷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인들은 비가 쏟아지는 참호 안에서 추위와 습기, 두려움과 공포, 배고픔과 졸음을 트렌치코트와 함께 견뎌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그들은 차마 코트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전역한 군인이 군복을 계속 고집하는 질환은 어느 시대나 공통된 현상이다. 그들은 무기 대신 망치를 들고 전후복구를 위해 산업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군인이라는 이름 대신 산업역군으로 불렸다. 그러나 돌아온 건 고단한 육신과 빵 한 조각뿐이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도 여전히 세상은 시궁창이다. 나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트렌치코트는 역경을 극복한 승전보이자, 죽어간 전우의 피였다.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샌 날이며, 우글거리는 벌레와 뼈에 박히는 추위, 끈끈한 습기가 피부에 오롯이 새겨진 시간이다. 그리고 무너진 폐허에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 눈물과 땀이자, 자본가에게 착취당한 노동의 결과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들에게 트렌치코트를 물려준다. 자랑이나 업적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트렌치코트는 기억이다.      


나에게 트렌치코트가 값비싼 멍석을 둘둘 말아 걸친 것처럼, 어디 한 군데라도 어울리는 구석을 찾을 수 없는 건 참호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입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 바바리는 어느 특정 집단을 나타내는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잘못 입고 나섰다가 여학교 앞에서 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이 옷을 내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카사블랑카를 다시 보았다. 어릴 때 보았던 영화가 아니었다. 지금은 클리셰가 되어버린 설정과 장면들이 수시로 툭툭 튀어나와 당혹스러웠다. 특히 아버지가 술 마실 때마다 외치던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의 원 대사가 ‘Here's looking at you, kid!’라는 것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건배사로 쓰이는 ‘Here's to the pleasure of just looking at you, kid.’를 줄인 것이라고 하는데, 번역가의 꼬임에 넘어가 아버지가 마셨던 그 많은 술을 생각하면 기도 안 찬다. 아버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술 취한 아빠의 눈동자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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