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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May 12. 2018

1968년 봄, 나는 일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엇비슷한 종류의 포스터가 연달아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나같이 1968년을 기념하는 내용이었다. 올해가 2018년이니 50주년에 해당했다. 대통령궁과 그 앞의 공원은 특설무대와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고, 곳곳에서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공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태블릿을 꺼내 포스터에 적힌 문구를 찾아보았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 떴다. 

‘1968년 봄, 나는 일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 파시스트 자본주의적인 독백은? 그림과 번역된 문장으로만 보면 무슨 산업혁명에 대한 거대한 굴뚝이 튀어나올 것처럼 살벌하고 으스스했다. ‘tôi’가 ‘나’이고 ‘xuân’이 ‘봄’이라는 것 빼고는 아는 단어가 없었다. 얼추 구글의 번역이 맞는다면 짐작컨대 1968년 봄에 있었던 구정대공세에 대한 기념인 듯했다.     


1968년은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격변의 해다. 유럽에서는 프라하의 봄과 68혁명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존 F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김신조가 청와대로 돌격했으며, 여의도를 조성하기 위해 한강의 밤섬이 폭파되었다.


또한 1968년은 베트남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65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전쟁이 걸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67년 한 해 동안 북베트남을 상대로 대대적인 총공세를 펼쳤다.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런데 68년 구정이 가까워지면서 이상한 기류가 감지됐다. 수세에 몰리던 북베트남군이 다낭과 나짱, 후에 등지에서 미군부대를 상대로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북베트남군으로서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설상가상 베트콩에 의한 미국대사관 테러가 사이공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전선이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설 휴가를 떠난 군인들은 복귀조차 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남베트남과 미군은 술렁였고, 미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어? 이거 우리가 이기던 게임 아니었어?’


이 일로 미국 여론이 급격하게 돌아섰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한 종군기자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른바 ‘사이공식 처형(Saigon Execution)’이라고 명명된 사진이 발표되자, 미국 내에 반전 시위가 들끓었다. 후에 사진을 찍은 기자는 그 사진으로 퓰리처상까지 받게 된다. 


북베트남의 구정대공세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2달이 넘게 진행된 북베트남의 공격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여론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방송과 언론은 베트콩 대신 미국 수뇌부를 공격했다. 국제사회도 미국에 핏대를 세웠다. 궁지에 몰린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게 협상을 제안하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겨울, 베트남 철수를 공략으로 내건 공화당 후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때부터 협상도 아니고 싸움도 아닌 지지부진한 전쟁이 이어졌다. 1973년 미국은 결국 파리에서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당사자 간의 전쟁이었다. 이후, 2년을 더 끌던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남부해방일, 사이공 시내로 진입하는 북베트남군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어떤 이득도 얻지 못했다. 8년의 전쟁 기간 동안 6만 명이 사망했고 30만 명이 다쳤으며. 2천억 달러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미군이 베트남 중부에 쏟아부은 폭탄의 양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수천 배에 이르렀다는 자체 감사보고서가 나왔다. 밤새 산 하나가 가루가 되도록 폭탄을 쏟아부어도 다음날 아침 어디선가 어김없이 베트콩이 기어 나왔다는 미군들의 증언은 엄살이 아니었다. 


미군에게는 적이 많았다. 열대우림 기후와 벌레, 하루 사이에 쑥쑥 자라는 밀림, 그리고 끈질긴 베트콩이 있었다. 예전에 베트남전에 관한 책을 보다가 베트콩의 식량보급 투쟁 방식을 읽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런 식이다.

한 명의 베트콩이 진지가 있는 숲에서 식량을 구하러 나온다. 그는 여러 날을 걸어 마을에 도착한다. 쌀포대를 지고 다시 부대로 복귀한다. 지도에도 없는 좁은 밀림지대를 요리조리 헤치며 기어간다. 가는 데 보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도중 생쌀을 먹는다. 그렇게 부대에 도착하면 쌀포대에는 쌀이 절반도 남지 않는다. 한 주먹만 남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렇게 하는 동료가 수백 명에 이르고, 그 역시 그날 바로 식량을 구하러 다시 떠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미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화염방사기로 불을 질러도 밀림은 며칠 뒤면 제 모습을 찾았다. 자연의 왕성한 복원력은 제초제를 무력화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베트콩이 가져가지 못하게 식량을 불태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태워도 3 모작을 하는 베트남의 쌀농사를 따라갈 수 없었다. 미군들은 논을 불태우고 농민을 학살했다.


처음부터 미국이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군사적으로 압도했으나, 여론전에서 실패했다. 호치민의 전기를 읽어보면 베트남이 과거에 어떤 식으로 강대국들을 상대했는지 잘 나와 있다. 프랑스를 상대할 땐 일본의 힘을 얻고, 영국을 상대로 할 땐 중국의 힘을 받고, 일본을 상대할 땐 미국의 힘을 빌리는 식이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몰라도 외교술에 능란했다. 호치민이 5개 국어를 했다는 말이 낭설은 아닌 듯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에디 아담스(Eddie Adams)의 ‘사이공식 처형’에는 다른 뒷얘기가 있다. 

saigon execution

사진 속에서 무고한 희생자로 보였던 인물은 베트콩 암살 부대 책임자인 ‘응우옌 반 렘’이었다. 그리고 그를 무자비하게 처형한 남자는 남베트남 경찰청장 ‘구옌 곡 로안’이었다. 당시 렘은 구정대공세 기간에 남베트남 핵심요원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상태였다. 두 사람 다 자기 할 일을 한 것이었다. 로안은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 함락되던 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탈출하였다. 버지니아주에 정착했으나 평생 ‘살인자’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며 외롭게 살다가 타향에서 죽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지금의 베트남을 가능하게 했던 해이니만큼 1968년 봄 이후, 일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이제 그들은 무기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밀림을 휘젓던 두 발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산업현장을 누빈다. 설날부터 승전기념일이 있는 4월까지 그들은 매일 밤 축제를 벌일 것이다.


*saigon execution 사진 출처 타임지

이 장면의 전후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로안의 일상적인 모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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