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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May 05. 2018

입국심사

우리 가족이 호치민 탄손녓 공항에 내린 것은 한국에 한파가 몰아치기 직전이었고, 베트남 축구대표가 U-23에서 결승행 티켓을 거머쥔 다음날 새벽이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을 날아갈 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2시간의 시차만 하염없이 흘러갔고, 다리 뻗을 곳을 찾지 못한 엉덩이와 허리는 딱딱하게 굳어갔다. 


인간의 신체가 금전의 차별과 효율성 속에 속박당하는 5시간이 지나 비행기의 작은 창문으로 시가지의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무덤덤하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작은 불빛들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끝도 없이 반짝거렸다.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창가에 고개를 파묻고 밖을 내다보았다. 드디어 꿈에서 그리던 베트남이었다. 아내도 졸린 눈을 뜨고 창밖을 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하늘의 또 다른 바다

상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건 잠깐이었다. 비행기는 연결 게이트를 찾아 공항 끝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어둠 속이라 밖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착륙에서 게이트 연결까지 시간이 한참 소요되는 것을 보면 13년 전보다 공항이 커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게이트가 열린 곳은 국내선 승하차장이었다. 새벽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국제선과 구분이 없는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잠에 빠진 아이들을 챙겨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출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내린 곳은 출구에서 가장 먼 게이트였다. 중간중간에 무빙워크가 있기는 했지만 직선거리만 어림잡아도 1km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새벽에 입국자들을 상대로 체력테스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좁은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뭉친 몸을 풀라는 공항 측의 세심한 배려가 틀림없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어기적대며 출구로 나오니 입국심사대가 보였다. 예전엔 출입국카드를 작성해야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권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며 입국심사를 하는 심사원들을 지켜보았다. 다들 무표정하고 따분한 얼굴이었다. 한 여덟 명 정도가 앉아있는데 한결같았다. 새벽이라 피곤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베트남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어느 나라나 심사원들은 항상 그렇다. 심사원은 자고로 표정의 변화가 없어야 한다. 화가 난 얼굴이면 금상첨화이고, 근엄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격요건이 된다. 태어날 때부터 인생의 쓴맛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진로를 바꿀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 각국의 공항심사대에 앉아있는 모든 심사원들의 얼굴이 이와 같을 수는 없다. 나는 한 번도 심사원의 따뜻한 미소를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의 심사원이 다음 차례인 나에게 검지를 들어 개에게 명령을 하듯 기다리라는 지시를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 있다 나올 때까지 나는 온순한 학생처럼 얌전하게 기다렸다. 큰 아이가 다른 줄은 줄어드는데 왜 우리는 가만있느냐고 재촉했다. 나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가만히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2002년 내가 처음 베트남으로 여행 왔을 때 떠돌던 소문이 있었다. 그즈음 베트남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농촌에서도 단체로 관광 오는 사람이 많았다. 생애 처음 해외여행을 떠난 농민들에게 공항의 규칙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입국심사가 뭔 대수냐며, 웃고 떠들면서 입국장을 시끄럽게 했다. 몇 차례의 경고가 주어졌다. 그렇다고 말을 들을 우리나라 아저씨들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소주도 몇 병 깠겠다, 좀도 쑤시겠다, 말도 알아들을 수 없겠다, 못 사는 나라라는 편견까지 겹쳐, 심사원의 경고를 무시하고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오기도 작동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참다 참다 심사원 한 명이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한 사람의 머리에 갖다 대고는 방아쇠를 뒤로 당겼다. 일순 정적이 흘렀고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끽 소리도 못하고 가지런히 줄을 섰다. 그 뒤로 군대문화에 익숙한 한국 아저씨들은 온순한 양처럼 자신들이 ‘베트콩’이라고 놀리던 공산당원 앞에 주눅이 들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입국장을 떠나야 했다.


총구가 겨눠진 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과장된 일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사례들이 꽤 있었는지 여행사를 통해 비자를 받으러 가면 입국장을 조심하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호치민 입국장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심사원들의 복장은 촌스럽긴 해도 제법 부드러웠다. 예전처럼 짙은 녹색 정복에 모자까지 착용하지 않았고 총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심사대 앞에 서서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라디오를 작게 틀어놓고 음악을 듣기까지 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위탁수하물을 찾아 나오니 어느덧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이동식 와이파이를 켜고 돈을 환전했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 가방에 구겨 넣고 공항 근처에 미리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다. 


공항 출구로 나오자, 예상대로 택시 삐끼들이 날 파리 떼처럼 달라붙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집요하지 않았다. 두 번 거절하면 물러설 줄 아는 관용이 있었다. 우리는 가방을 끌고 걸어서 호텔로 갔다. 구글 지도로 보면 꽤 가까운 길인데, 공항 철망이 문제였다. 공항 주위를 배회하는 우리 가족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5분도 안 되는 길을 20분 넘게 돌아서 호텔로 갔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었다.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새벽, 잠에 빠지지 못한 사람들 몇몇이 길가에 모여 앉아 쌀국수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몇 대가 시끄러운 소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쓰레기들이 도로변에 가득했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가로등과 전광판, 그리고 각종 사인물의 불빛이 어지럽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 쥐 서너 마리가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물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어슬렁거리며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본 둘째 놈이 비명을 지르며 엄마 뒤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베트남에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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