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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May 19. 2018

오토바이, 베트남의 정수

남의 나라 걱정할 때가 아닌 줄 알면서 베트남의 대기가 제일 염려스러웠다. 살 때도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오토바이에서 방출되는 시커먼 배기가스를 보면서 지옥이 따로 없구나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콧속이 하도 새까매서 코털인지 수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매연 소굴로 들어간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수소문해보니 대중교통이 나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교통사정이 좋아졌다고 해서 오토바이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13년 전보다 배는 더 많아졌다. 차이라면 헬멧 안 쓴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점뿐이었다. 물론 외곽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벗어던지기 십상이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 오토바이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선다. 집 없는 사람에게는 이동식 침대이고, 여가를 즐기는 휴게실이며, 간편식을 먹는 식당이다. 나아가 연인들에게 오붓한 모텔이 되기도 한다. 좁은 안장 위가 마치 38평 아파트가 되기라도 한 듯이 절묘한 자세로 잠을 자고, 먹고, 놀고, 휴식을 취한다. 오토바이 한 대로 트럭이 운송하지 못하는 대형 유리나 소량의 건축자재를 실어 나르는가 하면, 묘기에 가까운 자세로 운전을 한다. 굳이 요가가 필요 없는 숙련자들이다.


나는 그들이 내가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더 편한 자세로 오토바이 위에서 자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다리를 핸들에 걸치고 등과 머리를 안장에 눕힌 자세는 하나의 매뉴얼처럼 모두가 동일하다.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개중에 요령을 부릴 줄 아는 이는 해먹을 가지고 다니면서 근처 나무와 오토바이 사이에 걸어서 보다 넓은 공간을 마련한다. 


한 번은 여섯 명이 한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운전자 한 명, 그 앞에 어린아이, 운전자 뒤에 두 명, 그리고 맨 뒤에 일어서서 가는 한 명과 그에게 업힌 또 다른 아이.         


기온이 올라가는 우기가 되면, 시원한 장소를 찾아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로 각 공원과 호수, 강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오토바이 위에서 그들이 벌이는 아슬아슬한 행각은 눈을 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다. 손과 다리가 엉키고 입술이 포개지는 것은 예사다. 이러한 커플들이 한두 걸음 간격을 두고 붙어있다. 자유를 만끽하면서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배려의 자세. 베트남의 성문화가 얼마나 개방적인지 알 수 있는 단면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연출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그 좁은 안장 위에서 만리장성을 쌓는 연인들의 그 포스트모던한 광경을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베트남은 오토바이를 어떻게 버리느냐가 최대의 과제다. 교통, 환경, 에너지, 교육, 경제 분야가 오토바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이슈든 오토바이가 거론되면 원점으로 돌아간다. 예전에 베트남 친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베트남은 기름이 물보다 싸서 걱정이야.”

왜 그런지 물었다.

“사람들이 쓸데없이 오토바이를 몰아.”

정말 그랬다. 그들은 이유도 정처도 없이 달렸다. 전화 한 통화로 끝날 일에 1시간을 오토바이로 달려갔다. 물 한 모금 마시려고 30분을 달린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급유만 해결되면 지구 끝이라도 달려갈 체력과 시간적 여유가 그들에겐 충분했다. 


물보다 싼 기름 값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교통 혼잡, 환경파괴, 수질오염, 대기 질 악화, 소음문제, 노동의 비효율성, 도심 인구의 집중화로 나타났다. 붕타우 해변에서 바다에 떠있는 유전을 볼 수 있다. 하루에 수만 배럴의 원유가 올라온다는 곳이다. 그건 말 그대로 분수처럼 솟아오른다는 표현이 적절한 양이었다. 


이제는 정부가 기름 값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싼 물 값이 1리터 한 통에 한화로 300원가량했는데, 기름은 그에 세 배가 넘는 천 원 꼴이었다. 물가를 고려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기름 값이 비싸지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예전에 없던 배달문화였다. 직접 음식을 사러 가던 사람들이 전화로 주문을 하는가 하면 택배가 가능했다. 하루 종일 시동을 켜놓고 에어컨을 가동하던 차들을 볼 수 없었고,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카플과 비슷한 오토플을 맺어주는 어플이 인기였다. 또한 지방 국도에 간이로 설치된 기름통에 보이지 않던 자물쇠가 등장했다. 물 도둑은 있어도 기름 도둑은 없다던 말이 무색했다. 내가 살 때는 전기도둑이 극성이었다. 한 번은 하룻밤 사이에 한 지역의 전기선이 모조리 사라진 사건이 발생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2015년 한 조사를 보면 가구당 한 달 생활비에서 기름 값이 차지하는 비율이 20%에 육박한다는 통계치가 있다. 4인 기준으로 4대의 오토바이를 굴린다고 해도 상당히 높은 수치다. 베트남 당국은 기름 값을 지속적으로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전철이 완공되면 또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다. 호치민시는 6개 노선을 목표로 현재 1호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토바이가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들에게 오토바이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다.     


베트남인들은 고등학생만 되면 일단 오토바이부터 산다. 핸들 잡을 힘만 있으면 된다. 빚을 내건 폐품을 조립하건 상관없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집이나 오토바이가 식구 수만큼 있어서. 대여섯 대는 기본이다. 보통 1층에 있는 거실은 오토바이가 가득하다. 그렇게 오토바이와 함께 평생을 산다. 우리에게 숟가락을 놓는다는 표현이 있듯 그들에게는 핸들을 놓는다는 표현이 있다. 오토바이를 몰 힘이 없어지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오토바이는 반려자면서 또 다른 분신이다.                 

누군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화단 아래 몰래 숨겨둔 음료수와 간식


그러한 베트남의 대표적인 교통문화가 ‘세 옴(xe ôm)’이다. ‘세’는 오토바이를 말하고, ‘옴’은 안는다는 뜻으로, 포괄적으로 오토바이 뒤에 앉아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흔히 오토바이운전사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세 옴의 힘은 강력하다. 특히 오지에서는 개인 승용차나 세 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운임은 손님과 운전사의 합의에 따라 달라진다. 정해진 룰이 없기 때문에 분쟁의 소지가 다분하다. 흥정이 틀어지면 다른 세 옴을 찾으면 그만이지만 근처에 있는 세 옴들은 모두 한통속이다. 목적지에 내려 말을 바꾸는 세 옴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외국인이 오토바이를 직접 모는 방법을 택한다. 나도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거주하던 당시엔 외국인에게 제약이 많았다. 가장 큰 것이 사고처리였다. 일부러 외국인이 모는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교통경찰은 언더머니를 뜯어내기 좋은 외국인을 주 단속 대상으로 삼았다. 같이 신호를 위반해도 외국인만 딱지를 끊었다. 


2005년, 내가 베트남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란젤리나’ 커플이 호치민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여행을 온 브래드 피트는 안젤리나 졸리를 뒤에 태우고 세 옴처럼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헬멧을 쓰지 않은 세기의 커플을 보면서 왜 단속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13년 전의 베트남은 도로의 무법자 ‘세 옴’과 택시 간의 피 튀기는 전쟁터였다. 서로 누가 승객의 뒤통수를 잘 때리느냐로 명성이 자자했다. 간혹 씨클로가 고래싸움에 끼어들기는 했으나, 물량 면에서 세 옴과 택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의 주력 대상은 나와 같은 어리바리한 외국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충무로에서 명동까지 택시비로 10만 원을 지불했다는 외국인의 경험담이 신문기사에 등장하곤 하지만 그런 건 애교에 불과하다. 통일궁에서 데탐까지 1시간을 달려간 외국인도 적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그가 가는 중간에 코끼리를 보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도로 사정과 길을 꿰고 있는 나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길로 돌거나,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양반이었다. 미터기 조작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내가 처음 배운 베트남 말이 안 어이(아저씨), 디 탕(직진), 벤 짜이(왼쪽), 벤 파이(오른쪽), 응응(정지), 냔냔, 냔곤(빨리빨리) 같은 단어였다. 그럴싸하게 말하기 위해서 베트남 직원들의 도움으로 발음 연습을 수백 번 넘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말들은 다 잊었는데, 호치민에 도착하자마자 돈에 관련된 말과 이 같은 단어가 저절로 툭 튀어나와서 신기했다.


그런 세 옴의 불합리한 구조는 ‘그랩(Grab)’에 의해 180도 달라졌다. 우리에겐 생소한 어플이지만 동남아시아에선 2012년에 설립된 이후 폭발적인 성장세를 거듭해왔다. 우버와 같은 시스템을 오토바이까지 확장시킨 것이 주효했다.              

그로 인해 베트남의 세 옴 시장은 완전히 개편되었다. 헬멧도 쓰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던 세 옴들이 유니폼에 헬멧까지 쓰고 거리를 누비고 있다. 거리의 무법자라는 불명예는 사라지고, 4~50대가 주축이던 운전사들이 2~30대로 빠르게 교체되었다.     


오토바이의 행렬을 보고 있으면 경외심마저 든다. 저 많은 오토바이가 사고도 없이 지나가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은 논외로 한다. 적어도 나는 사고 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사는 동안에도 여행하는 동안에도 그랬다. 앰뷸런스 소리가 자주 들리곤 하지만 그것이 오토바이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토바이 위에서 자다가 떨어진 낙상사고라면 몰라도.


*Brad Pitt, Angelina Jolie 사진출처 www.chr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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