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려는 마음
각 세대마다 그 세대를 대표하는 트라우마를 몇 개씩 가진채 살고 있는 것 같다.
1980년대 초반 출생인 내 세대의 트라우마는 사회변화의 '어중간'함에서 비롯된 것들. 사복을 입고 등교하며 서태지라는 문화를 향유한 진보적 시대를 살았던 앞 세대와 입시제도의 급격한 변화와 사교육 시장의 부흥으로 대학의 서열화를 온 몸으로 겪은 보수적 시대의 후 세대 사이에서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함을 겪은 세대.
실제로 난 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첫 세대이고 수능이 있으나 수시입학이 가능해진 첫 세대이며, HOT가 있었으나 두발과 복장의 검열이 까다로워진 방송을 보고 자란 세대이기도 하다.
더하여 딸도 대학에 보내는 것이 당연한 시대이면서도 성별로 인한 낙태율이 높아 여남성비차가 큰 세대이기도 하지ㅎ
덕분에, 앞선 세대의 진보적 문화를 보고 자라 마음 속엔 열정이 꿈틀꿈틀한데 뒷 세대까지 이어진 급격한 사회 보수화로 마음껏 나대지 못했던 세대이며 여권신장을 외치며 대학에 들어가 원하는 직업을 갖는 친구들 사이에서 딸이니 대학에 보내줄 수 없다는 집안 사정에 마음을 졸였던 장녀로써의 내 트라우마는 '피해의식'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내 부모세대인 1950년대 출생 세대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을까?
전쟁을 겪으며 모두가 가난했던 시대에서 경제부흥으로 개천에서 나는 용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시대로의 전환점에 태어난 세대. 한 명의 개룡을 만들기 위해 집안 구성원 모두가 희생해야 했던 세대? 성공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가족 구성원(대부분 장남)의 성공을 위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세대?
피해망상으로 인생의 갖가지 트라우마를 늘어놓는 엄마를 보니 내 부모의 세대는 강요받은 희생과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감에 억눌린 세대로써의 트라우마를 가진 것 같다. 나와 똑같은 피해의식이지만 결이 다른 피해의식.
이 피해의식은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내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내 부모세대들은 대체로 활동적이다. 요즘 60세가 무슨 노인이냐며 인생 2막을 설계하기 위해 공부도 정보수집도 열심인 세대. 일에서 손을 놓지 않은 주변을 부러워하고 3D 직종이 아니라 번듯한 직업을 구하기 위해 공인중계사니 요양보호사이니 하는 직업에 관심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지쳐있기도 하다. 이만큼 일했으니 이제 일에서 손을 놓거나 소일거리 정도만 하며 자식들에게 용돈받아 해외여행도 다니고 싶고 십수년만에 만난 초등중등고등 동창들과 어린시절을 떠올리고 어울려 놀며 힐링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가끔은, 나는 뼈빠지게 가족들을 부양했는데 자식세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현실이 억울하고 부양해준 가족들에게 존경이라는 댓가를 받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괜한 어깃장을 놓기도 한다.
이런 주변의 부모세대들을 보며 엄마의 피해의식을 가늠해 보려고 한다.
장남과 장녀에게 빼앗기기만 했던 유년시절 차녀의 설움과 가정주부로 집안일만 하고자 했으나 경제사정에 떠밀려 일을 다녔고, 그럼에도 자기계발의 끈을 놓지 않아 뒤늦게라도 전문대학을 졸업하여 번듯한 직업을 갖고 일을 하고 있는 엄마의 상황에서 어떠한 트라우마가 있어 지금의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
고민을 거듭해 엄마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면 엄마의 피해망상에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겠지. 피해망상이 극복되진 않더라도 악화는 되지 말도록 잘 지원할 수 있게 되겠지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으려
나는. 지금. 노력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