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이따이에서의 이직 휴가
다음 월요일이 공휴일이라 주말에 하루가 더 추가된 어느 주간이었다. 황금연휴라 하기에는 짧지만 어쨌든 평소보다 더 긴 주말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 좋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몇 주 전부터 친구들과 나는 이날만을 노리고 휴가를 계획했고, 마닐라에서 2-3시간 떨어진 따가이따이로 호캉스 여행을 떠났다.
이전 회사에서 퇴사한 후 다음 직장으로 첫 출근을 하기 전에 즐기는 휴가인만큼 ‘이보다 더 열심히 쉴 수 없다’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푹 쉬고 싶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배움으로 채워 놓던 머릿속의 한 바구니를 구석에 옮겨 놓고, 새 바구니 하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말 아무 생각 없는 주말을 보내고 싶었다.
낮의 하늘을 보면서 ‘구름이 다섯 점이 보이는구나’ 생각하고 얼굴에 닿는 햇볕과 더위를 달래주는 바람을 마시면서 쉬어 가는 휴가를 즐겼다. 따가이따이는 따알 호수가 있어 아무래도 마닐라보다는 바람이 많이 부는데, 어느새 해가 지고 온수가 나오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마쳤을 때에는 벌벌 떨 정도로 날씨가 추워져 ‘아 따뜻해’라고 하며 젖은 몸의 추위를 없애 주는 주문을 외우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호텔방으로 뛰어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다음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잡았다. 수프를 먹으며 몸을 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늘의 수프라고 소개된 치킨 수프를 주문했는데 주문한 것과는 달리 토마토 수프가 나와버렸다. 메뉴 소개가 잘 못 되었던 것이 웃겼는지 어느 것을 갖다 주던 아무렴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모습이 이 행복한 순간을 잘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아 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날 그 외에도 정말 소소한 것들로 많이 웃었다.
마지막 날 아침, 호텔 조식 시간이 마치기 한 시간 전에 부랴부랴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수영장을 끼고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메뉴판을 훑어보는데 느글느글한 음식이 당기던 나에게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아메리칸 브렉퍼스트였다.
주문을 마치고 우리는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레스토랑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으며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내 눈에 메뉴판이 들어왔다. 포토샵까지 필요할 정도의 수준이 아닌, 워드만 만질 수 있다면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을 법한 심플한 메뉴였다. 손님들의 눈을 유혹할 만한 맛있는 음식 사진도 없었고, 각 음식마다 설명도 길지 않게 해 놓은 메뉴판을 보면서 이전 직장에서 하던 일들이 생각났다. 메뉴판 디자인, 등 마케팅 자료들을 제작하는 일들을 해서 그런지 그날의 나는 메뉴판 디자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다음번에 이곳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는 공사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만큼 레스토랑의 기둥이 어떻게 세워졌으며 안테나들이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관찰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회사에서의 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떠난다고 말했을 때, 나의 기대와는 달리 특별히 아쉬워하는 말도 못 들었을뿐더러 인수인계나 잘하고 가라는 차가운 말을 들었다. 나에게는 속상했던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인 마냥 나누는 것을 들었을 때, 나한테는 없는 줄만 알았던 자존심이 상해버렸고 나 조차도 그런 영향을 입는 나 자신이 놀라웠다.
여태껏 나는 정말 회사라는 굴레에 언제든지 끼워 놓고 굴리다가 필요하지 않다 싶을 때 새것으로 갈아 끼워 놓을 수 있는 한 부분이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 왔었나 보다. 아니, 혼자만의 환상 속에서 헤벌쭉해 있었나 보다. 또 한편으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정말 나 자신을 사리지 않고 일을 했을까?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내 이야기를 해도 ‘아니야. 나는 최선을 다 했고, 이 회사가 아까운 결정을 한 거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주위 어른들이 나는 회사에서 최소한의 대접도 못 받았다고, 알아서 챙겨 줘야 할 것들도 못 받았다고, 핀잔을 주었다. 물론 나름 걱정이 되는 부분들이 있어해 주시는 말들이겠지만 이제 와서 어떡하라고 그런 말들을 하시는 걸까? 음, 사실 그 말들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고 하기보다는 그런 대우가 잘 못 되었다는 걸 몰랐던 나에게 ‘응, 충분히 상처 받을 일들이야 그건, 이 바보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왜 내가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때는 아무 말도 없었으면서, 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이미 다 끝난 후에야 ‘넌 왜 멍청하게…’라고 하는 걸까? 전혀 내 기분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말들인데 말이다.
그런 핀잔들은 물론 그들도 나를 위해 함께 마음 아파해주는 의미로 해주는 것이겠지만, 이미 아픈 내 마음을 더 쑤시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차라리 당연한 대우를 못 받았다 하더라도 이미 끝난 이상 시원하게 잊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다. 앞으로는 그런 상처를 받지 않도록 덜 순수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현실이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이 그렇다 하니 어찌하랴. 이 세상 모든 어른들은 그런 상처들이 겹쳐 흉터로 빚어진 존재들일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마지막으로 휴가는 끝났고, 나는 내 생의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면 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업그레이드된 어른이 되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