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노트
청소년 또는 대학생 내담자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비밀보장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보호자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하는 내담자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욕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말하기가 힘들어요."
가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보호자에게서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타인에게 그를 나쁘게 말하는 것처럼 여겨져 입을 떼기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를 나쁘게 말하는 건 곧 나를 욕보이는 일'처럼 여겨지는 문화가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호자가 나에게 상처 준 일을 꺼내어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 흠이 될까 두려워, 혹은 내가 불효를 저지르는 게 아닐까 두려워 상담에서조차 이 이야기를 꺼낼 때 수많은 망설임이 앞서게 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그동안 나를 먹여주고 입혀준 사람이라면,
아직도 나와 함께 살고 있고 나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받았던 상처를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는 게 맞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잘해준 순간도 있었던 사람이니까. 어쨌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받았던 상처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아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죠. 나의 아픔과 고통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습니다.
마음노트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부모님을 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경험했던 아픔과 상처를 함께 들여다보는 과정이에요."
상담에서 다루는 건 ‘보호자’가 아니라 ‘당신'의 경험입니다.
과거에 들었던 한 마디가 왜 그렇게 슬펐는지,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났는지, 왜 그 기억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거죠.
사랑해도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해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가끔은 싫을 수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다양한 색깔과 마음을 가진 존재니까요.
보호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며, 사랑하지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묻어두지 않고 함께 꺼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뒤에도, 어떤 분들은 여전히 나의 경험과 감정보다 타인의 사정을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엄마도 제가 첫 자식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겠죠."
"그때는 두 분 다 돈을 버느라 바빴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었겠죠."
그때 보호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려는 시도는 물론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 당신이 느꼈던 마음이 더 궁금해요.
그래서 그 순간 당신은 어떤 걸 느꼈는지, 모든 걸 이해하더라도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말이에요.
우리는 참 타인에게 관대하고 스스로에게는 각박하죠.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데는 많은 노력을 쏟지만, 정작 내 안의 아픔과 상처는 무시하곤 합니다.
참아야 한다, 참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내 안에 충분히 알아주지 못한 슬픔과 속상함, 두려움, 분노가 있잖아요. 알아달라고 몸부림치는 고통이 있어요. 그건 온전한 나만의 경험과 감정이에요. 다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살펴줄 수 없는 것들이죠.
내가 그때 깊은 슬픔을 느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는 것을, 몸이 떨리는 수치심을 경험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보호자를 욕보이거나 탓하는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관대해져 봅시다.
나의 감정에 조금 더 귀기울여 봐요.
나의 이야기를 편견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아 보세요.
그럼 그게 다시 또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줄 거예요.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알 수 없는 괴로움을 견디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솔직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가끔은 사랑하고, 가끔은 싫어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