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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터뷸런스 May 23. 2018

행복하고 싶다면 착할 필요 없다.

착하고 착하고 착해서 늘 양보만 하고 선의를 베풀며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은 늘 손해만 볼 수밖에 없다.

방어기제의 하나로 착함이 작동하는 건데, 누군가에게서 공격당하지 않게 자신을 착한 사람으로 미리 세팅하는 거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혼자 파고드는 생각의 늪이 깊다. 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고민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쉽게 생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거기서 생기는 괴로움을 무언가에 중독되는 형태로 해소하려 하게 된다. 내가 그랬으니까.

지독하게 결핍되거나 감정이 과잉되는 경우 그것을 해소할만한 거리를 찾게 되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저지른다. 나 같은 경우 지독한 게임중독과 쇼핑중독 증상이 있었다. 

의사 변호사 교사 같은 사회 지식인층에서 성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것도 여기서 기인된다고 본다. 

사회적 위치와 지위로 인해, 보이는 모습에 과하게 충실하다 보면 생기는 병폐랄까.


실제론 안 그런 사람이 그런 척하려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도 간단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신의 방식이 없으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된다. 

이럴 땐 착하고 저럴땐 나쁜 놈이 돼버리면 자신만의 방식은 확립되지 않는다.


때로는 주변에서 원하지 않는 방식을 고수함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것도 감수해봐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 자신의 주관은 확보된다.

사물을 냉정하게 바라볼 때는 객관성이 필요하지만, 그 안에서 가치판단을 할 때는 절대적으로 주관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사에 팔랑귀가 돼버린다. 

시류에 영합하여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전환해버리는 태세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우리는 우디르나 슈퍼맨이 아니다. 

살다가 만나는 백 명을 모두 만족시켜줄 수 없고, 하는 모든 일들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당신의 캐릭터가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10명이라면, 90명의 마음이 돌아서는 것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개 인간관계로 고통받는 사람은 자신이 만족시킬 수 없는 90명에게도 정성을 쏟는다. 

그러니 본인도 재미없고 억지 연기를 바라보는 90명의 반응도 참담하다.


그렇다고 직관대로만 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일들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고민하는 게 맞다. 다만 몸으로 부딪히며 겪어나가거나 깨달아 나가야 할 것들에 까지도 굳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일단 본인 방식대로 해보라는 거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방식이 확립되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잘 맞는지 찾아지기 시작한다.

내가 나인 것이 싫지 않아야 한다.  원하는 모습대로 사는 것에 대한 평가를 타인에게 맡기지 않아야 한다.

진짜 이득을 보고 싶다면, 대다수가 원하는 뻔한 취향과 기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어차피 당신과 오래, 멀리 갈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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