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땐 이왕이면 알프스를 보고 우울해하자

설산의 햇볕과 바람에 우울을 말리는 법

by 월급쟁이 노마드

바쁜 1월이었다. 원래라면 1월은 신년 업무계획을 세우고 자료들을 정리하는 고요한 달이어야 했다. 그리고 2월엔 스위스 학교의 스키방학이 있으니 다들 적당히 휴가를 떠날테고 그 사이의 작은 회의들만 참석하면 될 것 같았다. 근데 이게 무슨일인가 1월초부터 몰아쳤다. 실무자로써 바른 방향이 아닌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진행해야겠고 그 일은 나비효과를 일으켜 나의 연말과 연초를 힘들게했다.


늘 일이야 그냥 하면 되는거 아니냐고 말해왔었는데 막상 내가 복잡한 상황을 겪으니 아무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도 우중충하니 우울감이 찾아왔다. 원래도 있던 저혈압이 더 심해지는지 흐린날이면 유독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찾아온 주말. 날씨 예보를 보니 이번 주말도 흐리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스키장 웹캠을 찾아봤다. 스위스나 프랑스 스키장은 웹캠이 나름 친절하게 잘되어있다. 다른 온라인 시스템에 비해 놀라울 정도랄까? 웹캠을 보니 새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고 어제 그제 날씨를 돌려보니 아주 맑았다.


그래, 흐린날 집에 앉아서 우울해하느니 차라리 알프스 설산을 보며 우울해하는게 낫지 않나 싶어서 바로 스키 리프트권을 충전하고 늘 가는 스키렌탈샵에서 장비를 예약했다. 다음날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괜히 급하게 예약했나라는 생각이 살짝 스쳐갔다. 한번 나들이에 200프랑은 드는데.. 그치만 선불이어서 되돌릴수 없었고 배우자와 나는 해도 안뜬 이른 아침에 집에서 1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스키장으로 향했다.

망설였던게 무색할만큼 스키장으로 가는길은 아름다웠고 고도를 높일수록 햇살도 더 따스해졌다. 스키를 렌탈샵에서 갈아신고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데 장관이었다. 어제 저녁에 살짝 눈이 왔는지 설질도 좋아서 나같은 초보가 타기에 폭신했고 넘어져도 아프지 않았다. 점차 스키 실력이 늘면서 그래도 풍경을 즐기면서 탈 정도가 되었다. 완만한 직선코스를 타면서 아름다운 설산을 눈에 담았다. 바람을 가르면서 달리는 기분이 좋았고 꿀꿀하던 기분도 나아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집밖으로 나오길 잘했구나. 울어도 알프스를 보면서 우는게 낫구나.


기분이 환기된다는게 어떤말인지 알 것 같았다. 스키장의 새하얀 눈이 내 마음을 정화해주었다. 게다가 오늘 스키의 다른 매력을 깨닫게 됐다. 걱정과 고민을 잊는데는 스키가 최고였다. 스키를 탈때만큼은 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에서 주말을 보냈더라면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에 크로와상을 먹으면서 빨래를 널면서 청소를 하면서도 문득 일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스키는 내가 딴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과 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해야했다. 잡생각을 할 근육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 몸 가누기도 힘든데 내 인생에서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 생각 날리가 없었다.


그리고 정상에서 마신 핫초코는 뜨끈하게 몸을 녹이면서 당을 끌어올려 주었다. 알프스와 핫초코, 완벽한 조합이었다. 물론 이런 아름다운 감상 뒤로하고 나와 배우자는 역시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며 어쨌든 이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데도 돈이 드니 이렇게 누릴수 있음에 감사해하고 돈을 열심히 벌자는 세속적인 결론에 도달했지만 말이다. 틀린말은 아니지 않은가.

집에 돌아오니 해가 어느덧 지고 있었다. 신라면 두봉에다가 밥까지 야무지게 말아먹으니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햇볕을 많이 쬐서 그런지 우울함도 마른 빨래처럼 건조되었다.


살다보면 우울한 날은 있다. 다만 이왕 우울할거면 햇볕과 바람을 쬐면서 우울해하려고 한다. 빨래를 말리듯 내 우울한 감정을 말려서 기분을 뽀송뽀송하게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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