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여행의 묘미란
20대 때 론리 플래닛 한 권과 배낭을 들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던 그때,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배낭하나로 여행이 가능하던 그때, 나는 내가 여행에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평생 여행만 하고 살아도 재밌을 것 같았고, 그 덕분에 월급쟁이 노마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여행의 재미를 잃어버렸다. 나를 생기 있게 만들어주던 그 여행이 어찌 이리도 밋밋한 단어가 되어 버린 걸까.
먼저 '탐험'하는 재미가 줄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2010년대만 하더라도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여행을 가기 위해 책을 사야만 했다. 한국 가이드 책도 많았지만 난 사진보다 글로 풀어낸 론리 플래닛을 선호했다. 몇백 페이지에 달하는 론리 플래닛을 정성스럽게 도시별로 분권 해서 모서리에 테이프를 붙이고, 그 도시의 여행이 끝나면 그 장을 과감히 버렸다.
부킹닷컴이나 호스텔닷컴과 같은 플랫폼도 거의 활성화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기에 45일의 여정에 첫 숙소 1박만 예약을 하고 무작정 떠났고, 그 이후 도시를 옮길 때마다 중심가로 가서 게스트하우스라고 적힌 곳들을 일일이 방문해 가며 방 있나요? 뜨거운 물 나오나요?를 묻고, 그날의 숙소로 결정했다. 분명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했는데 막상 지내면 안 나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내가 고르고 고른 숙소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근데 요즘은 어떤가. 여행 가기 전부터 숙소를 고심해서 고른다. 플랫폼에 들어가서 평점 9점 이상, 한국인 평이 좋은 곳, 적어도 리뷰가 300개 이상일 것, 그래도 이제 배우자가 있으니 너무 가성비만 따질 수도 없다. 무조건 4성급 정도의 호텔과 그때 여유가 있다면 5성급까지 둘러본다. 부족하다 싶으면 포털사이트에 호텔이름을 치고 블로거들의 후기를 본다. 그렇게도 부지런할 수가 없다. 체크인부터 아침식사까지 1박 2일을 그렇게 자세하게 남기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미 숙소를 예약하기도 전에 그 호텔의 조식과 룸서비스까지 다 익힌 기분이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 진짜 그 숙소를 맞이할 때. 두 가지 기분으로 나뉜다. 생각보다 별론데? 또는 생각보다 괜찮은데? 딱 두 가지의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 수많은 리뷰어들의 선택으로 정해진 숙소인지라 경험하는 재미가 없다.
현지 투어를 신청할 때도 그때는 가판대나 여행사에 직접 들어가서 흥정을 했다. 물론 덤터기를 쓴 날들도 많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추억이 되었고, 계속하다 보니 좋은 여행 상품을 고르는 안목과 사장님과 노련하게 흥정도 가능했다. 요즘은 다양한 플랫폼에서 가격을 비교하고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합리적이라고 해서 재미를 보장하진 않는다. 여행을 합리성만 좇아한다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은가.
스위스 여행을 하면서 론리플래닛을 가지고 여행하는 상상을 가끔 한다. 사진도 몇 장 없는 빽빽이 글로만 채워진 론리플래닛을 읽으면서 풍경을 상상해 보고, 실제 거대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황홀할까. 도시에 도착해서 샬레와 호텔을 돌아다니며 방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양한 숙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잃어버린 여행의 묘미를 되찾기 위해 디지털 디톡스 여행을 한번 해봐야겠다. 범람하는 정보의 파도 속에 실려가 버린 여행의 재미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