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겐빌리아의 그리고 튀니지의 산토리니
지중해, 그저 낭만적이다.
분명 그 단어가 주는 낭만이 있다.
누가 나한테 꿈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딜 놀러 갔다가 차가 너무 많이 밀려서 짜증이 난 상태에서 갑자기 받은 질문이었는데, 그때 난 그렇게 답했다. '난 그냥 집 마당에 올리브 나무, 레몬 나무가 자라고 내 배우자와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 삶이면 충분해. 집 근처에 바다가 있다면 더 좋고. 그렇게 사는 게 내 꿈이야' 대답하고 보니 지중해의 삶이다.
내가 처음 접한 지중해는 그리스에서였다. 대학생 시절 과외, 학원 보조선생님, 기숙사 조교로 열심히 돈을 모아 45일간 무작정 그리스, 이집트, 터키를 떠났을 때, 그때부터 지중해의 매력에 빠졌다. 그리스 아테네도 아름다웠지만 산토리니는 내가 생각한 지중해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게 된 꽃이 있는데 그게 부겐빌리아였다. 짙은 분홍색, 다홍색, 흰색까지 다양한 색깔이 있는데 그중에 으뜸은 짙은 분홍색이다. 하얀 건물, 파란 문, 그리고 분홍색 부겐빌리아, 이 세 가지면 지중해를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우연인지, 또 누군가가 내 소원을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몇 년이 흘러 튀니지에 도착했다. 튀니지에는 '시디부사이드'라는 마을이 있는데 별칭이 튀니지의 산토리니다. 그리스 산토리니를 생각하고 간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튀니지에서 지내는 내내 내게는 시디부사이드가 산토리니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가 지중해에 살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켜 줬다. 분홍색 부겐빌리아와 함께. 지중해의 에너지를 주는 꽃이었다.
아래는 내가 아주 좋아했던 마을 시디부사이드의 사진이다. 상상이나 가는가. 부겐빌리아가 없는 모습이. 시디부사이드, 산토리니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건 저 꽃이었다.
튀니지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디부사이드에 가는 건 내 주말 루틴이 되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방향이 아니라 항구 쪽으로 내려가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해변을 따라 반대편으로 걸어 올라가면 끝없는 수평선과 에메랄드빛 지중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한 주를 보내고 주말에 시디부사이드 산책을 할 때면 저 푸른빛에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잔잔한 파도를 계속 바라보다 보면 내 걱정과 고민도 저 바다에 흘려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매주 주말마다 혹은 일이 힘들었던 평일 저녁마다 매번 찾았지만 지중해의 풍경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던 날들이었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었다.
항구에서부터 이어진 오르막길을 지나쳐, 내가 좋아하는 La villa Bleu 호텔을 지나면 Cafe des Delices가 나온다. 가장 유명한 포토스팟이지만 관광지의 번잡스러움을 피해 얼른 발길을 돌리곤 한다. 그리고 배가 출출할 땐 튀니지의 도넛, 밤발루니를 먹은 다음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간다. 단순한 산책길이었다.
시디부사이드는 거의 매 주말마다 산책을 하러 간 곳이었고, 하늘의 빛에 따라 바다의 물빛이 바뀌는 변화들을 관찰하는 것도 즐거웠다. 구름의 빛깔에 따라 자유자재로 색을 바꾸는 지중해는 파란색 도화지 같았다. 잔잔하다가도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성을 내며 회색 빛을 띠기도 했다. 저 바다도 저렇게 변화무쌍한데 인간인 나의 마음도 저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부겐빌리아의 색깔이 진해지거나 바래질 때 계절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지난주보다 이번 주 색이 더 선명해졌을 때, 나도 좀 더 생기를 띠었던 것 같다.
거의 사계절 내내 부겐빌리아가 피어있는 시디부사이드는 내 마음의 안식처였고, 나의 체력을 길러주는 주말 운동 코스였다. 주말이면 그렇게 부겐빌리아의 분홍빛 에너지와 지중해 해변을 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튀니지를 떠난 지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부겐빌리아를 보면 나도 모르게 튀니지와 내가 좋아했던 마을들이 떠오른다.
그 시절 그렇게 많았던 근심, 걱정들은 다 지워져 버렸고, 아름다운 지중해와 부겐빌리아만 남았다.
분명 지중해가 주는 낭만이 있다. 지중해에 살았지만 지중해라는 단어만 들어도 아직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