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랑 20년만 더 살아보기로 했다

졸혼은 잠시 미뤄두고..

by 열정아줌마

지난 주말에 티브이를 보다가 모 연예인이 꽃장식에만 1억을 쓰는 걸 보고 새삼 내 결혼식이 생각났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그냥 옛날 결혼식장. 뷔페 이용 조건에 대관이며 드레스가 다 무료였던 가성비 끝판왕 결혼식!

지금이야 어느 예식장을 가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내부지만 그때는 정말 우리 부모님 세대 결혼식 사진에서 볼 법한 옛날식 예식장이 제법 남아 있었다. 그런 세월의 야속함보다도 버진로드에 대한 어떤 기대도 설렘도 가지지 않았던 내가 오히려 이상한 거였나? 왜 그랬을까? 잠시 그때 생각에 빠져버렸다.


남편을 만나기 전 나는 결혼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그리 행복하지 않던 부모님을 보며 자랐고 서른 전엔 결혼하지 않겠다던 내 절대신념은 스물아홉에 무너지고 말았다. 적극적인 남자를 만나 뭐에 홀린 듯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나는 그 남자와 결혼했고 심지어 18년째 아이 셋을 낳고 함께 살고 있다. 미쳤어 증말!!


한참 티브이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결혼식을 구경하면서 잠시 내 표정이 오묘했나 보다. 큰아이가 대뜸

"엄마~20주년 때 리마인드 웨딩해드릴까요?"

"문디 졸혼식이나 해도라"


애들은 웃고 남편은 뭐라카노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부터 나는 졸혼을 할 거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고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한다. 지가 설마 뭐 그러겠어 그런 마음이겠지. 하지만, 60이 되면 정말 졸혼을 할 것이고 그때는 지금까지 내 맘대로 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최근에 무너지고 있다. 이 남자가 변하고 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했더니 조금씩 보완하면 된단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인간. 말은 잘해. 하여튼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내가 많이 죽여 놓긴 했다. 얼마 전 정신과 상담에 가기 전 남편이 자기 욕 하고 오라고 당신 불안의 근원이 나인 거 같으니 자기 얘기를 털어놓고 나면 좀 나아질 거란다. 어디서도 남편 험담을 잘하지 않는 내가 갑자기? 험담 아니 앞담화의 허락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하라고 했으니 하는 거지 뭐. 상담하면서 처음으로 내 얘기를 제대로 해 본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주절주절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아... 내가 불면증에 시달렸던 게 우리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부터구나...'


남편 흉을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내 든든한 지원군! 늘 칭찬해 주시고 챙겨주시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셨던 우리 아버님. 그분이 안계시구나. 갑자기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남편에게 받은 서러움과 무심함을 아버님이 늘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분이 안 계시니 그런 거였구나. 근데 이제 돌아오시지 못하는 곳으로 가셨는데 어쩌지?

엄청 울었던 거 같다. 처음으로 남 앞에서 그렇게 울고 나니 부끄러움보다 오히려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에게 오늘 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했다. 하면서도 또 흐르는 눈물에 내가 아직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얘기를 조용히 듣던 남편이 내가 잘해볼게라고 무심하게 툭 던지며 말했다. 그 순간 그 남자는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몇 분만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아버님과 제대로 된 이별을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남자랑 앞으로 좀 더 살아야겠다는 아이러니한 다짐을 했다. 어쩌면 남편도 아버님 나이쯤 되면 그 분과 같은 아량과 배려와 사랑이 생겨 있지 않을까? 이왕 내 발등 내가 찍은 거 끝까지 가보지 뭐. 어쩌면 이제 내가 이 엉망진창인 인간을 진짜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봐서 아니다 싶으면 졸혼하면 되는 거니까 까짓 거 말이다.



© nickkarvouni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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