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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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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Aug 14. 2023

정신과 진료대기실에서 만난 할머니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9시 50분부터 진료시작인데 굳이 9시부터 가서 기다린다. 대기 1번의 짜릿함을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조용히 텅 빈 대기실에서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그러다 책을 보기도 하고 기다리는 50분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엊그제 병원을 방문했을 땐 아쉽게도 내가 대기 1번이 아니었다. 나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구나. 잠시 해이해졌군. 쳇.. 이럴 땐 그냥 읽다 만 책 한 페이지라도 읽는 게 낫다. 구석자리로 가서 어제 읽다 만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의 페이지를 열어서 한참 빠져들고 있었다. 


늘 그렇듯 아무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청력만 열어둔 채 핸드폰으로 책을 보고 있었는데 내 옆에 하얀 머리를 힘 있게 말고 꽃무늬 옷을 위아래로 걸친 할머니 한 분이 조용히 앉으셨다. 혹시나 내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나 싶어서 살짝 비켜나면서 할머니랑 본의 아니게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인데.. 말거시면 어쩌지.. 최대한 눈을 떼지 말고 집중하자 집중.


이런 느낌은 거의 백발백중이라 옆에 계시던 할머니는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 같은 말을 하시기 시작했다. 


"아이고, 피곤해라. 새댁이도 잠을 못 자서 왔는교?"

새댁이... 주변을 둘러보니 나한테 하신 말씀이시다.

"아, 네.. 그러게요."


"나는 다른 병원에서 약을 3개월 타 먹었는데 너무 아침에 못 일어나서 약이 센 거라.. 그래 누가 요기 소개해주가 오늘 첨 왔다 아인교"

"아, 그러시구나. 여긴 약이 좀 순한 거 같아요. 부작용도 없고"


내가 맞장구를 쳐드리니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신다. 진료시간까지 30분이 넘게 남았고, 할머니는 기력이 없다 하시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가셨다.


"우리 아저씨가 집안일을 참 잘 도와줘. 설거지도 해주고, 장도 봐다 주고.."

"우와, 너무 좋으시겠는데요~ 그 연세 아버님들 잘 안 하시잖아요"


"그래 장을 봐오지, 자기 먹고 싶은 걸 사 와서는 내보고 하라잖아. 그럼 또 그걸 지지고 볶고 힘이 들어 죽겠다고. 그래도 먹고 또 설거지는 한다이"

웃참..... 결국 남편 흉인 듯 아닌 듯 하소연이셨다. 

"이제 밥이고 뭐고 다 귀찮은데 수발들어야 한다아인교 내가!! 우리 영감도 무릎이 안 좋다카믄서도 그래 장을 보러 댕긴다 환장한다이." 한참 그렇게 남편 분의 칭찬 아닌 칭찬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어제 우리 큰 며느리가 반찬을 해다가 집 앞에 갖다 두고 갔더라고"

"요새 그런 며느리 없는데 자식 복이 많으시네요"

"고등어조림이랑 뭐 오이무침이랑(한숨을 푹 쉬시고는) 그런 건 나도 할 줄 아는데 맨날 그것만 해온다니까"

도대체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다. 이제 섣부른 대답도 못하겠다. 


"아, 네.."

"우리 집은 둘째 며느리가 참 잘해. 참 착해. 용돈도 잘 주고 맛있는데도 자주 데려가고"


진료시간이 거의 다 되어갈 때쯤 할머니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밥 이제 그만하고 싶고, 자식들아 반찬 말고 용돈을 주던가 아니면 맛있는 데로 데리고 가다오....'


초보도 중년도 머리가 하얗게 백발이 되어도 주부의 마음은 다 똑같은 가보다. 끝나지 않을 걸 같던 대화가 내 진료 시간이 되어 끝이 났다. 나오면서 아직 한 참 순번이 남은 할머니께 꾸벅 인사했다. 더 할 말이 남아 보이는 아쉬운 표정.. 다음에 또 만나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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