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쉬어 가며. 근데 너무 쉬는데?ㅎㅎ
친구 1) "야, **때메 미치겠다. 방학이라고 계속 뒹굴거리고 꼴 보기 싫어 돌아버리겠다."
나) "방학인데 좀 그러면 어때서?"
친구 2) "맞다. 이제 시작인데 하루 이틀은 좀 놔두라."
친구 1) "고1인데 학원 갔다 왔으면 복습도 하고 해야지. 오자마자 소파에서 뒹굴뒹굴, 지금 놀 때가? 기말고사 개판 쳐놓고."
친구 3-일본거주) "우리 애들은 아직 얼굴도 못 봤다. 공부는 안 하는 게 확실한데 방에서 안 나온다."
친구 4인방의 단톡방에 이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나의 승리다.ㅋㅋ정신승리!
친구 1) "그 꼴을 보고 있나?"
나) "내가 깔아줬는데?"
친구 1) "초등학생이잖아."
나) "니는 애들 초등학생 때 놀게 해 줬나?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친구 1) "맞지, 학원 보냈지. 나는 저 꼴은 못 본다"
친구 2) "가쓰나야, 방학인데 좀 쉬면 어때서! 뭘 그리 아를 들들 볶노! 잘하는 애를, 지 알아 할 건데."
나, 친구 2, 친구 3) "니가 문제다."
심지어 특목고 다니는 아이다. 잘 치면 금상첨화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아직 오지도 않은 다음 시험을 닦달하는 게 마음이 불편하다. 다음에 잘하면 되는 거지. 인생 끝나는 것도 아닌데 시험 등급 하나에 발발 떠는 친구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지는 지방대 나와놓고 딸내미는 서울대 보내려는 건 이기적이지 않나? 친구들이 직언에 폭탄을 날려도 그때뿐, 그래서, 나머지 친구들한테 매일 욕을 먹으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어쩌리~~ 그녀만의 교육방식인 걸. 누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어쩌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큰 아이의 친구의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는데 왜 죽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아이임에도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부모의 기대가 높은 만큼 죽을 때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했음인지 아파트 옥상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할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시렸다.
엊그제, 아이들을 데리고 혹서기 극기 훈련(뒷산 등산)을 다녀왔다. 땀 한껏 흘리고, 시장에서 칼국수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개운하게 샤워 후 다시 뒹굴뒹굴. 우리 집 방학은 언제나 뒹굴뒹굴이 가능한 상태로 열려 있다. 자기 방을 두고, 심지어 아주 푹신한 침대를 두고, 굳이 왜 저러고 싶은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들 나름의 일탈인 셈이다 싶어 원하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랬더니, 한 놈은 방학숙제를 한다며 지가 알아서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고, 다음 주 한국사 시험을 앞둔 막내와 나는 외워지지 않는 그놈의 것들을 외우느라 머리를 맞대고 있다. 갑자기 웬 한국사 시험이냐고? 막내가 학교에서 선생님께 공표를 했단다. 올해 안에 한국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말을 내뱉고 큰일이다 싶어 걱정하기에 같이 해보자고 했다.(미쳤지. 미쳤지. 내가 미쳤지.) 초등학교 6학년, 심화를 치기엔 어휘가 많이 어렵지 싶었다. 도와주면서 나도 이번에 제대로 한 번 공부해보자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막상 시험이 닥치니 후회가 막심이다. 밥 먹다가 문제도 내고, 모르는 건 다시 확인하면서 안 그래도 끈적끈적한 모자사이가 딱 달라붙을 지경이다. 뒹굴거리지만, 알아서 할 일을 찾아 하는데 굳이 잔소리할 필요가 있을까?(물론, 더 빨리 하면 좋겠는데라는 마음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건, 아이들은 절대 내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심은 모종이 잘 자라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잘 자라는지 들여다만 보고 있을 게 아니라. 적당한 시기에 물을 주고, 적당한 시기에 잎을 골라 주고, 적당한 시기에 지지대만 세워 주면 된다. 적당한 관심만 주면 지가 알아서 큰다는 말이다. 아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주고 하고 싶다는 게 있으면 지원해 주면 될 일이다. (물론 답답하고, 짜증 나고, 확 저 시끼를 그냥 하는 마음이 자주 들 수는 있다). 자진해서 헬리콥터도 돼지 엄마도 될 필요가 없다. 부모마다 자신만의 교육, 육아철학이 있겠지만, 대화가 단절된 채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그 사이의 싱크홀이 커지면 커질수록 돌아오는 길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든 틀에 넣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틀 안에서 숨 막히는 건 결국 내 배 아파 낳은 귀한 내 새끼다. 내가 아이의 숨통을 조으는 불행은 없어야 하지 않나.
모든 걸 엄마가 만들어주는 세상에서 자라는 아이의 자존감은 절대 보장할 수 없다. 후회도 좌절도 스스로 해 봐야 또 한걸음 성장할 수 있다. 그때 엄마는 도닥도닥거리고, 이런 방법도 있다 어드바이스해 줄 수 있다. (물론, 이때도 짜증이 솟구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무관심을 가장한 관심. 입은 닫고 눈은 더 크게 뜨되 방향은 항상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아이 쪽을 주시해선 안 된다. 크게 보고, 멀리 보자. 우물에서 키우지 말고 큰 바다에서 키우자. 한 곳만 바라보지 말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자. 때론 태풍에 휘말려도 보고, 때론 방향도 잃어보고, 그러다 자기만의 길을 찾게 될 때 아이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홀로서기를 한 아이는 다른 이들과 조화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 분명하다. 믿어주자.(물론, 부모의 속은 타들어 가고, 때론 정신과 상담을 요할 정도의 화병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아이는 반드시 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