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은 그 말을 끝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인턴 생활로 인한 고단함도 있었지만, 그날 하루 그가 받은 충격은 엄마의 기억까지 더해져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했다. 미경은 그의 손을 잡고, 밤새 곁을 지켰다. 열 시간을 자고 난 우진은 미경에게 함께 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미경은 당연하다는 듯 따라나섰다. 그와 함께 등교한 적은 많았지만, 상황이 달랐다. 약속된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가 병원에 안 나타나자, 전화기는 어젯밤부터 계속 울리고 있었다. 우진은 결정한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 교수의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우진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미경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나고, 내가 그다.’ 미경은 그렇게 마음먹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어? 자네는 현호 친구 아닌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저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하 교수는 뜬금없는 우진의 말에,
“그러니까, 현호 친구잖아. 우리 학교 학생이고, 알아보다마다.”
“아니요! 김미경의 아들. 하우진이 되어야 했을 전우진 말입니다.”
하 교수는 정지 상태로 할 말을 잃은 듯 우진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엄마는 제 건선 홍피증을 그 옛날에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낫게 해 주셨는데, 하 교수님은 아직 못 고치셨나 봅니다.”
하 교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을 애써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자네가 미경이 아들이라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생물학적으로 당신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제 엄마에겐 당신밖에 없었으니까요.”
우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를 만큼 우진은 흥분해 있었다.
“모른척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엄마와 내가 느낀 고통만큼 당신과 당신의 아들을 괴롭히고, 당신의 가족 모두 파괴해 버리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사랑했던 여자를 가차 없이 버렸고, 그 매몰참은 저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되었더군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던 하 교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나?”
“말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차가운 땅 밑에 있는 우리 엄마를 다시 살려낼 수라도 있나요? 네?”
“미경이가 죽었다고.”
하 교수는 혼잣말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 당황했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당신에게 버려지고, 스스로에게도 버려졌지요. 죽기 직전까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아십니까?”
우진은 울부짖으며 말했다. ‘이십여 년 전 엄마를 버릴 때도 이랬겠구나.’ 생각하니,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왜 그렇게 차가웠는지 이제야 엄마의 아픔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미안하네. 많이 후회했어. 진심이네.”
여전히 하 교수는 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우진은 끓어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집 나오던 날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하 교수를 비아냥거렸다.
“아∼, 후회하셨구나. 후회했다는 분이 곧바로 결혼도 하시고? 엄마는 단 한 번도 찾지 않고 말이죠. 이십 년이에요. 이십 년. 한 여자의 인생이 당신 때문에 망가졌다고요. 알긴 알아요?”
“어떻게 말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을 걸 아네. 미안하네.”
우진은 하 교수를 때릴 듯이 눈앞까지 다가가 주먹을 쥐었다. 미경은 재빨리 다가가 그의 옷을 잡았다. 미경이 아니었다면 우진은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우진은 미경의 손을 잡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더 뻔뻔하게 나왔어야 한다. 엄마를 버린 그라면, 갖은 핑계를 대야만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복수하기도 전에 김이 새 버렸다. 그 사람은 우진의 아빠가 될 자격이 없었다.
우진은 미경에게 집에서 기다려달라고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혼이 나면서도 그가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처리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수학 문제를 풀던 그였다. 바쁜 것만이 지금 그의 마음을 가라앉혀 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 교수는 부임한 지 일주일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갑자기 쓰러져 입원 중이며 의식은 있지만, 마비로 인해 움직일 수가 없어 경과를 보는 중이라고 했다. 현호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엄마가 다를 뿐, 그의 형제였다. ‘너는 친아빠와 살았겠구나, 사랑 듬뿍 받으며.’ 부러워지려는 찰나 전현수, 그의 아빠가 생각났다. ‘어설픈 아빠지만 나에겐 네 아빠보다 더 멋진 아빠가 있어. 너 따위 부럽지 않아.’ 우진은 현호에게는 끝까지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 아니듯, 그도 잘못이 없다. 미움도 원망도 다 부질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증오하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진은 그의 엄마에게 배웠다. 더 이상 부모 탓만 하는 바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제야, 황망하고, 아리고, 시린 구름 이불이 그리워졌다. 너무나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