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은 현호와 함께 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부임해 온 첫날, 현호가 미리 아버지께 우진을 인사시키려고 데리고 온 거였다. 곧 이분의 수업을 듣게 될 것이다. 방 앞에는 교수의 이름과 담당 과가 적혀 있었다. 우진은 긴장한 탓에 현호의 뒤만 바짝 쫓고 있었다.
현호는 경쾌하게 노크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현호의 아빠는 아들을 격하게 환영하며 안아주었다. 보기 좋은 부자 사이였다. 우진은 혼자 있는 아빠가 보고 싶었다. 이번 주에 집에 한 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격렬한 부자의 상봉이 끝나길 기다렸다.
“아빠, 제 친구 우진이예요. 제가 말씀드린 적 있죠?”
“아, 그 친구로구나. 내 수업 들을지도 모르겠네. 반가워.”
“전우진입니다. 교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하 교수는 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악수에 응하고 의자에 앉았다. 지도 교수가 될지도 모르는 분을 처음 뵙는 자리다. 우진은 긴장감이 돌았다. 그 긴장감을 눈치라도 챈 듯 하 교수는 직접 음료까지 대접해 주며 친근하게 대했다. 그러던 중, 현호가 아빠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또 번지네. 아빠 건선은 왜 이렇게 안 낫는대. 보통 얼굴엔 안 생기는데 아빠는 특이하게 얼굴만 이러네. 홍피증? 하여튼, 아빠 친구분들 많잖아요. 치료 좀 제대로 받으라니까.”
“시간 없어. 인마. 연고 바르면 돼. 괜찮아.”
서일대학. 미국. 하민준. 건선홍피증....
우진은 손에 들린 잔을 놓칠 뻔했다. 그리고, 잊은 일이 있다며 급히 방을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확인해야 했다. 비어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고 있다. 그 조각이 맞는지 확인하는 길은 아빠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왜 이렇게 급해?”
“아빠,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 해요. 제 친아버지 미국에 있는 거 맞아요?”
“그게 궁금해서 이렇게 달려왔어? 미국 갔다가 공부 마치고 들어왔어. 10년 정도 지났지 아마?”
“그럼, 엄마는 그 사람 만난 적 있어요?”
“아니, 이미 결혼까지 했더라. 미국 가서 바로. 아이도 있고. 아마 너랑 동갑일걸? 그 얘기 듣고 미경이가 많이 힘들어했어.”
“그게 가능해요?”
“양다리였지. 미경이가 만나려고 하지 않았어. 이미 끊어진 인연이라고. 여태 안 물어보더니 갑자기 왜? 찾아보려고?”
“찾은 거 같아서요. 그분 전공이 뭔지 아세요?”
“음…. 너랑 같아. 그게 네 엄마가 그렇게 그 대학을 강요했던 이유였고.”
“역시.... 저희 과 교수로 온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저를 못 알아보지만, 전 알겠더라고요, 아빠, 저 어떡해요? 사실을 안 이상 마주치면서 살아낼 자신이 없어요.”
“인연이 참….”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최 변과 소주 한 잔 나누며 하민준이 우진의 학교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날이 올 줄은 몰랐다. 모든 선택은 우진이 해야만 한다. 두려워도 맞설 것인지, 모른 척 살아갈 것인지.
미경은 답을 알 것 같았다. 이 길만 보고 왔는데, 이제 와서 왜 나타난 건지. 우진은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서는 우진의 얼굴에서 예삿일이 아닌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병원에 있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온다는 말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곧 흘러내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들어서는 우진이 걱정스러웠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우진은 미경을 끌어안았다.
“나 어떡해? 미경아, 나 어떡해?”
“무슨 일인데, 천천히 말해봐.”
“친아빠를 만났어. 그런데, 현호, 그 자식 아빠래. 우리 학교로 왔어.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미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친구다. 유일하게 우진이 마음을 여는 친구인데 이 기구한 인연을 어쩌면 좋을지 미경은 목이 메어왔다.
“얘기할 거야?”
“모르겠어. 내가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이 가능할까?”
“안 될 것 같아. 너라면.”
“나도 그래.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알잖아. 이제 와서 포기해야 해? 엄마와 날 버리고 딴 가정 꾸려 잘 사는 남자 때문에?”
“그러게. 이제 와서…. 어렵다.”
미경은 우진에게 답을 줄 수가 없었다. 그의 엄마가 평생 기다렸던 사람이다. 기다린 자는 볼 수 없고, 기다릴 생각도 없던 그가 그를 맞닥뜨렸다.
“꿈이었으면 좋겠어.”
미경은 그의 주변에 그들에게 익숙한 무력감이 머리를 쳐드는 것을 보았다.
“우진아, 네 마음 가는 데로 해. 내가 네 옆에 있을게.”
옆에 있어 주는 것 말고 미경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번엔 내가 지켜줘야 한다. 그의 팔목보다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