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고 미경은 우진의 집에서 그를 돌보았다. 아직 혼자 있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날 이후 둘은 편의점도 헬스장도 모두 그만두었다.
“미경아, 우리 같이 살까?”
먼저 말을 꺼낸 건 우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미경은 당황하면 나오는 그녀의 버릇대로 장난으로 받아쳤다.
“잘해주니까 또 기어오르지, 응? 뭘 같이 살아, 이 녀석아!”
“아니, 결혼하자는 건 아니니까 오해 말고.”
우진은 키득거리며 미경을 또 놀려댔다.
“아오, 열받아! 또, 누나를 갖고 놀지! 응?”
미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우진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건은 사람들에게서 잊혀 질 거야. 사람들은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거든. 하지만, 너와 내 기억엔 있잖아. 너 혼자 두려니 걱정이 돼서 그래. 난 이 녀석이라도 있는데, 넌 없잖아.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이 녀석이 되어 주려고. 네 방 빼고 내 방 줄게. 네가 다른 사람을 내 앞에 데리고 나타날 때까지만, 만약 5년이 지나도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시집오면 되는 거고. 그전까지는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할게. 어때?”
미경은 정말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형수에게 칼까지 맞은 이 아이에게 자신의 짐을 나누자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왜 나도 죽을까 봐? 너희 엄마 김미경처럼?”
“응. 나 이제 너 없는 거 상상할 수가 없어.”
우진의 진심을 미경도 알고 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신념 같은 게 생겨버렸다. 그가 진심으로 미경에게 든든한 존재가 되어 주려고 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면서도 그녀 역시 우진의 옆에 있고 싶었다. 누구보다 혼자 있는 공간, 그리고 시간이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진을 사랑하게 되었다.
입학한 우진은 너무나 바빴다. 같은 집에 있어도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원래도 공부밖에 모르던 녀석이다. 우진은 의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 4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이란 시간을 버텨야 한다. 집중하면 우진이다. 끈기도 기본적으로 갖고 태어났다. 시간은 조용히 그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의예과 2년은 생각보다 여유가 있었다. 본과에 가자, 본격적으로 정신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진은 의사면허를 땄고, 미경도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우진은 의예과 입학 후, 민석이와 비슷한 성격의 친구를 한 명 사귀었다. 잘난 척하지 않고, 성실한 녀석이다. 우진과 맞는 구석이 많았다. 이름은 현호. 바쁜 학교생활 중에 마음 맞는 친구 하나를 사귀었다는 건 정서적으로 우진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힘든 의대 생활을 그가 없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민석이도 서서히 그의 마음에서 사라져 갔다. 지겹던 인턴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나이 먹으며 제 역할을 충실히 해 내고 있었다.
“야, 전우진. 너는 인턴 끝나면 전공 어디로 정할 거야?”
“너는?”
“나? 흉부외과.”
“에? 다 가기 싫어하는데 거길 왜?”
“그래서, 들어가기 쉬울 거잖아. 경쟁률이 낮으니까. 하하하”
“야, 농담하지 말고, 진짜 어디 갈 거냐고.”
“진짜야. 한 번도 변한 적 없어. 어디 갈 거냐고 물은 건 난데 왜 나만 대답하고 있는 거지? 전우진?”
“아. 미안.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웩. 왜 하필?”
“나도 원하고, 우리 엄마도 원해서.”
“엄마 우울증 있으셔?”
“어.”
“야, 미안. 농담이었는데. 미안해. 진심이야.”
“아니야. 뭘 그런 걸로.”
“우리 아빠도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인데 미국 가셔서 뇌과학도 연구하셨다고 들었어. 뇌과학 쪽도 앞으로 가능성 높다고 하던데 그쪽은 생각해 본 적 없어?”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아직은 비밀인데 우리 아빠가 이번에 우리 학교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오셔. 아마, 그 부분을 접목해서 강의하고 연구하실 건가 봐.”
“아, 그렇구나. 나한텐 너무 다행인데? 곧 너희 아버지 밑에서 배우겠네.”
“각오 좀 해야 할걸. 유쾌하고 좋은 분인데 칼 같거든. 잘 생각해 봐. 아들인 내가 왜 그 밑으로 안 들어 가는지. 하하하”
우진은 현호가 부러웠다. 언젠가 현호가 자기 이름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의 초성을 따면 ‘ㅎㅎㅎ’가 된다. 언제 어디서나 웃으며 살라고 지어준 이름이란다. 다른 건 몰라도 괴짜임엔 분명하다.
미경과 우진은 여유가 되는 날이면 함께 마트도 가고, 보통의 연인들처럼 데이트도 하며 보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은 더 깊어졌고, 둘 다 서로가 아니면 이제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따뜻함은 그에게 위로였고, 우진은 그녀에게 울타리였다. 그들은 미완인 채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가고 있었다. 함께 산 지 벌써 6년째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넘으면 안 되는 금기의 벽이 있었다.
“미경아, 너 오늘만 내 방에서 자면 안 돼? 못 참겠다. 정말.”
“지켜준다며? 거짓말쟁이!”
“알았어, 그냥 안고만 자면 안 될까?”
“안돼!”
“흥! 고집불통 할망구 같으니!”
미경은 매일 밤 치근덕거리는 우진이 너무 귀여웠다. 이럴 땐 여지없는 어린 아이다. 거부하는 미경의 마음도 사실은 우진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애써 밀어냈다. 어쩌면 그녀는 자기의 짐을 우진에게 떠넘기게 될까봐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밤마다 그녀의 방에 와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행복했다. 우진도 미경도 목표한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진의 말처럼 시간은 모든 걸 잊게 만들어 주었다. 우진은 체력적으로 힘든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미경은 대학원으로 진학해 교수가 되길 꿈꿨다. 그러던 어느 날, 미경은 경찰로부터 확인할 것이 있으니, **병원 영안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진과 함께 찾은 그곳엔 백골 시신 한 구가 있었다. 미경은 의아해하며 이게 뭐냐는 투의 눈길로 형사를 쳐다보았다.
“입고 있던 옷에서 신분증이 나왔어요. 6년 정도 된 걸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통신 반응을 확인해 보니까 김형수 군 법원 판결나던 날부터 오프상태로 생활반응이 전무인 걸 보면, 아마 그날이 아닐까? 타살 정황도 보이지 않아요. 완전 백골화가 되어서 수사를 더 해봐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게 추측할 뿐입니다. 가능성은 없지만, 국과수에서 김미경 님의 DNA랑 일치한다는 연락이 오면 인계해 가시면 됩니다.”
그녀는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체면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배지는 삶의 전부였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우진과 함께 영안실을 나오며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진짜 혼자네.”
우진은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한다. 본인이 옆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누구보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능성이 없다던 DNA는 정확하게 백골이 미경의 부친임을 증명했다. 4선 의원까지 지낸 그였지만 빈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은 그녀의 아버지에게도 지나갔다. 많은 이들은 그를 잊었다. 일가친척 몇 분과 새엄마, 그리고, 미경. 그리고, 네댓의 검은 양복들. 형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친척분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출소 후, 어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새엄마 역시 아빠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이제야 혼인 관계가 법적으로 정리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눈치다. 새엄마는 장례가 끝나자마자, 상속에 관한 절차를 끝내고, 형수의 지분과 자신의 지분을 챙겨서 어디로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미경도 자신의 상속분을 법적 절차대로 받았지만, 그 돈은 그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극단적인 선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우진의 엄마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고, 미경의 아빠는 자신의 체면 때문에 같은 선택을 했다. 그 피해는 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 근본은 같다. 끝까지 자신의 감정 외엔 생각하지 않았다. 이기적이었다.
그날 밤, 우진은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미경을 꼭 안았다. 처음으로 둘은 같이 잠들었고, 둘의 마음을 확인했다. 우진은 인턴 생활이 끝나면,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결핍을 메꿔나갔다. 그렇게, 상처는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