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경은 우진과 헤어지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받지 않는다. 회의 중이니 어쩌고 형식적인 문자가 뜬다. ‘아빠가 있으면 뭐 해. 얼굴 보기도 힘든데.’ 괜히 가족이 그립다. 미경이 싫어서 나와 버린 집이다. 이제 와 바꿀 수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다. 미경도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었다. 씩씩한 척하는 것도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미경에게도 우진의 팔목에 있는 흔적 같은 친구가 필요했다.
잠시 편의점에 들른다는 우진을 뒤로하고 미경은 빠른 걸음으로 집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밤이 깊은 시간이다. 편의점에서 집까진 멀지 않다. 혼자 살기에 아무에게도 집을 알려주지 않았다. 뒤에서 나는 발소리는 더욱 대담해졌다. 미경은 가방에서 필통을 잡았다. 여차하면 코를 때리고 도망갈 요량이었다.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열리는 자동문 소리,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누르는 묵직한 손.
“악∼!”
“무슨 일이에요. 누나?”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우진이었다. 미경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야, 네가 여기 왜 있어? 너무 놀랐잖아.”
“나 오늘부터 여기 살아요. 잠깐만, 누나 집 여기였어? 맨날 역 쪽으로 가더니 페이크였다고? 우와. 우리 사이에 너무 한 거 아니에요?”
“혼자 사는 여자의 방어 본능이야.”
좀 전의 겁에 질린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다시 여장부 김미경으로 돌아왔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층 버튼에서 손가락이 닿아 버렸다.
“아, 이거 곤란한데.”
미경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우진은 피식 웃었다.
“잘 부탁해요. 이웃사촌님!”
미경은 전에 없이 마음이 놓였다. 우진이 같은 이웃이라면 괜찮을 거 같았다.
‘듬직하단 말이야. 저 자식.’
미경은 씻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여느 때와 달랐다. 그냥 보고 지나쳐야 정상이다. 기대도 하지 않던 전화가 울리니 ‘웬일이지?’라는 생각부터 든다. 미경은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딸, 아빠가 회식 중이어서 이제 봤어. 이번에도 장학금 받는다며? 역시 내 딸이야. 이번 주말에 너 시간 되면 낮에 집에 와서 밥 먹고 가. 엄마도 보고 싶어 해. 너무 안 왔잖아. 몸보신 거리 좀 해놓는다니까. 알았지? 꼭 왔다가! 기다리마.”
세상 다정한 목소리다. 못 본 지 오랜 딸을 그리워하는 천상 딸바보 톤이다.
‘아, 가기 싫어. 옆에 누가 있구나.’ 미경은 잠시나마 아빠가 보고 싶단 생각을 한 자신을 후회했다. ‘여차 없이 가게 생겼네. 에이.’ 그래도, 오랜만에 가는 건데 다녀오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형수도 아버지 앞에선 꼼짝 못 한다. 자신에게 관심이라고는 없는 아빠지만 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새엄마가 몸보신 거리를? 과연?’
미경은 아빠와 약속한 시각에 집으로 갔다. 미경의 아빠는 버선발로 나와 맞아 주었다. 형수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빠, 건강해 보이시네요. 다들 어딨어요?”
“형수는 나갔고, 엄마는 지금 주방에 있어.”
형수가 없다. 다행이다. 미경은 주방 쪽으로 향했다. ‘잠시만, 이건 무슨 상황이지?’ 카메라 몇 대가 주방에 세팅되어 있다. 새엄마는 한참 인터뷰하느라 그녀가 온 건 모르는 눈치였다. 식탁 위는 대한민국 산해진미는 다 모아 둔 것 같았다. 돌아 나와 아빠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곧 총선 있잖아. 후보를 돌아가면서 인터뷰한대. 너 집에 안 온 지 오래됐고, 겸사겸사. 하하하.”
“아빠, 저는 아닌 거 같아요. 돌아갈게요. 저 없어도 되잖아요.”
“가만있어.”
화가 나기 직전 나오는 나지막하고 압도적인 목소리. 미경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새로이 나타난 인물에 대해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새엄마의 인터뷰가 끝나고 이번엔 그녀 차례인가 보다. 그녀만 아는 아빠의 무서운 얼굴, 분명히 미소 짓고 있다. 하지만, 저 얼굴은 ‘너 협조해. 내 말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미경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소심하게 얘기한다. 학교생활에 지장이 있으니 얼굴 모자이크 부탁드린다고. 기자는 알았다고 답했다. 어린 시절에 의원님은 어떤 분이셨냐? 아빠가 지도를 어떻게 해주셨냐? 아빠를 중심으로 한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다. ‘다정하고 가정적인 분이시다. 아빠가 어릴 때부터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셔서 오히려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다.’ 아빠가 원하는 정답들만 앵무새처럼 읊어댔다. 주방에서 세 식구가 다정하고 오붓하게 식사하는 장면까지 촬영했다. 새엄마는 생선 살을 발라 미경의 밥 위에 올려 주고, 아빠는 전복장이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한다. 미경은 이 자리에 없는 형수가 부러웠다. 아마 그 녀석은 이런 숨 막히는 상황을 못 견뎠을 것이다. 아빠도 그걸 알고 미리 핑곗거리를 만들었겠지. 말 잘 듣고 순종적인 나를 정치마케팅에 활용하는 아빠. 구역질이 났다.
“저기, 의원님. 이 얘기는 좀 거북하실 수는 있겠지만, 많은 분이 궁금해하는 거라. 올해 초 아드님 학폭 사건 말입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예상이라도 한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아, 그 사건. 유가족분들께는 정말 죄송하고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들 녀석은 사회봉사 중입니다. 지금도 거기 가 있어요. 사춘기 시절 제가 바빠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람 만들어 놓겠습니다. 유가족분들과 심심찮게 합의가 된 부분이니 그 부분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경의 아빠는 예의 바르고 진정성 있게 그 부분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일반 사람들이 본다면 아들의 일탈에 본인이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미경은 역겨웠다. 식사가 끝나고 촬영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았다. 방송은 한 달 후에 나온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이다 싶어 팀 과제가 있어서 가봐야 한다며 정중하게 일어섰다. 아빠는 흡족한 표정으로 용돈까지 챙겨주며 안아준다. 뒤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미경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커뮤니티 공용 화장실로 가자마자 먹은 걸 전부 게워 냈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