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이 집을 나간 지 4개월이 지났다. 우진의 아빠는 아들에게 전화도, 문자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모든 사실을 다 말해버린 날, 우진의 엄마는 밤새 울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도 함께 울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미경도 우진도 가여웠다. 후회해 본들 이미 늦었다. 무엇보다 그는 친아빠가 아니지 않나. 은연중에 그 사실은 그의 애끓는 사랑과 부정(父情)을 눌렀고, 한 발 뒤로 물러나게끔 만들어 버렸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는 미경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진이 집을 나간 후, 미경은 매일 아들의 방에서 머물렀다. 텅 빈 방에서 어쩌면 다시 마주할 수 없을 아이를, 친아빠의 매몰참까지 닮아버린 그 아이를 이십 년 전 그때처럼 기다리고 있다. 모두에게 지옥 같았던 4개월 전 그날, 이 집의 시계는 온전히 멈춰 버렸다.
우진이 집을 나온 지 어느덧 5개월째에 접어들었고, 검정고시일이 다가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아침에 헬스장 오픈과 청소까지 하고 가도 늦지 않다. 운동은 하루쯤 안 해도 될 일이다. 그리고, 편의점 알바 시간까지도 충분히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진은 여느 때처럼 5시 50분에 헬스장을 오픈하고, 청소를 마친 후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버스를 탔다. 한참 가다 보니 익숙한 동네를 지난다. 노선표를 다시 확인해 보고는 집 앞을 지나가는 노선인걸 그제야 알았다. 옛날 생각이 스쳤다. 어릴 때 아빠랑 몰래 아이스크림 사 먹던 곳도 지나고, 이미 없어져 버린 문방구 앞도 지난다. 단편일 뿐이지만 내 어린 시절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 살짝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익숙한 동네가 끝날 무렵, 순간의 추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연하게도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지나가는 버스 안에 집 나간 아들이 타고 있을 거라고는 쉬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엄마는 그새 살이 많이 빠졌다. 아빠가 아니었다면 못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아빠 손에 약 봉투가 들려 있는 걸 보니 병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수척한 모습에 잠시 단전에서 찡한 무언가가 올라왔지만, 우진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진은 검정고시를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합격했다. 대충이 안 되는 성격은 여기서도 발휘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인터넷으로 발급받아 핸드폰에 사진으로 저장했다. 일하다가 잠시 찾아온 쉬는 시간, 미경에게 보란 듯이 펼쳐 보였다.
“뭐야? 너 검정고시 봤어? 언제? 그런 말 없었잖아! 음흉한 아이일세!!”
“뭔 소리예요. 음흉하다니. 이럴 땐 대견하다고 하는 거라고요. 서일대학은 어떻게 들어갔대, 참나.”
“너 겨우 합격했지? 잘했을 리가 없어.”
“내가 이럴 줄 알고, 이것도 챙겼지.”
우진은 검정고시 성적증명서까지 보여주었다.
“야, 너 내 동생한테 안 찍혀서 다행이다. 아, 미안. 농담이야. 그나저나 학교 다닐 때 몇 등급이었어?”
“1등급.”
“우와....... 공부랑 안맞아서 핑계대고 집 나온 줄 알았더니...”
갑자기 들어온 손님 때문에 대화는 끊겼다. 이 정도 대화가 이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편의점은 매일 바삐 돌아갔다. 지칠 대로 지친 두 사람은 야간 근무자에게 시재를 넘기고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우진은 어디선가 시원한 음료 두 잔을 사 들고 나타났다.
“내가 쏘는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오랜만에 편의점 이외의 걸 먹어본다. 고마워, 잘 마실게. 음! 이거 엄청 맛있네”
시원한 과일주스를 둘 다 한숨에 들이켰다. 날이 더우니 편의점을 찾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 네 시간이지만, 힘이 빠질 만도 했다. 미경은 예전부터 궁금했던 걸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집은 왜 나온 거야?”
우진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나는 동생 때문이라고 말했으니까, 너도 말해주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 아니 뭐,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되고.”
미경은 새초롬하게 다 먹은 컵만 애꿎게 만지작거렸다.
“김미경 때문에요.”
“뭐라고? 나 때문에? 내가 뭘 어째서? 형수 누나라서?”
“아 진짜, 서일대 어떻게 들어갔대. 누나 턱걸이했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거든 장학생으로 들어갔거든!”
씩씩거리는 미경 누나를 보니 귀엽다. 이 작고 귀여운 사람을 그리 무자비하게 때린 자식.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우진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김미경. 우리 엄마 이름이에요.”
“어머니랑 나랑 이름이 같네. 흔한 이름인데다 옛날 이름이라 바꿀까 했는데, 네 말 듣고 나니 왠지 바꾸면 안 될 거 같은데? 우진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마. 웬만하면 집에 들어가고... 나는 보고 싶어도 못 봐. 그 기분이 얼마나 끔찍한 줄 아니?”
“끔찍하다라...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음, 어떤 느낌이냐면 너무너무 마음이 추운 날. 기댈 곳도, 받아줄 곳도 없는 초라한 내 눈앞에 포근해 보이는 이불이 있어. 그 안에 들어가면 너무 따뜻하고 푹신하니 좋을 거 같은 거야. 그래서 풍덩 뛰어들어. 그런데, 아파. 분명히 따뜻하고 푹신한 이불 같았는데 안은 텅 비어 있었던 거야. 구름이었던 거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아. 무슨 짓을 해도 말이야. 한참을 허둥대다가 깨닫게 돼. 아, 이제 못 잡는 거야.... 황망하다고 해야 하나.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과연 있을까? 사무치는 걸로 모자라. 시리고, 아려. 온몸이.”
멍하니 땅을 응시하는 우진의 머리에 꿀밤을 날리며 미경이 다시 말했다.
“이해될 리가 없지, 꼬맹이. 더 살아봐야 해. 앉으니 가능하네. 이건 그때 꿀밤 갚는 거야!”
우진은 꿀밤 맞은 자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미경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나는 버림받았어. 엄마가 죽는 것보다 엄마에게 버려지는 게 더 비참할 거 같은데, 누나는 사랑받고 자랐으니 보고 싶은 거야. 나랑은 다르니까.’ 우진은 검정고시 치러 가던 날 보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게 엄마는 포근해 보이는 구름같은 존재는 절대 아니다. 가시뿐인 선인장이면 몰라도.
매일 똑같은 날들의 반복인 거 같지만, 시간은 열심히 제 역할을 한다.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편의점에 수능 합격 기원 물건들이 입고되기 시작했다.
“자, 이거. 너도 수능 시험 볼 거지? 도대체가 자기 말을 안 하니 선수 치는 수밖에.”
미경은 편의점에 들어오는 것 중에 제일 비싼 합격 선물을 주면서 머쓱해했다.
“돗자리 깔아도 되겠는데요? 고마워요, 누나. 너무 고가인데? 받아도 되려나.”
"받아. 나 임용시험 때 갚으면 되니까. 하하하. 인생 다 그런거야~"
"하하, 나참, 주고 받는 거 좋죠. 그때까지 연락하고 지낸다면 뭐. 얼마든지요."
둘은 한참 웃었다. 왠일로 편의점에 여유가 돌았다.
“그나저나, 수능도 수능인데 학교는 정한 거야?”
“서일대학이요.”
“진짜?”
“네, 왜요? 못 갈 것 같아요?”
“아니, 수시 못 보는 게 좀 아쉽긴 하다.”
“괜찮아요. 정시 자신 있어요. 모고 다운받아서 풀어봤는데 안정권이겠더라고요.”
“대단하다, 너. 쉽지 않을 텐데. 이젠 존경스럽다.”
우진은 결국 서일대학을 선택했다.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대학이다. 우진은 미국으로 대학을 가고 싶었다. 엄마가 원하는 서일대학에 입학하고, 군대까지 다녀와서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홀로 선 시간 동안 목표가 바뀌었다. 서일대 의대, 이거야말로 엄마가 원하던 길이다. 분명히 그의 의지로 방향을 틀었는데 다른 루트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그렇게 결정한 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번엔 엄마의 의견이 아닌 본인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정신분석학을 배워보고 싶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 길이 끌렸다.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생각,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심리.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가는 이유 등등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팔목에 새겨진 알 수 없는 흔적. 그 흔적이 생긴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직은 막연하고 또 먼길이지만 도전해 보고 싶었다. 집을 나오며 절대로 그 대학만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절대로의 법칙" 은 여기서 작용했다. 절대라는 말은 그 반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게 세상순환의 이치이다. 어찌되었건 자신의 의사로 결정하고 나니, 서일대도 엄마와 별개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미경 누나가 소문내고 다니는 바람에 편의점 사장님께도 찹쌀떡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헬스장 사장님, 그동안 친해진 형, 누나들이며 다른 회원님들도 깜짝 선물을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진짜, 누나 입이 너무 가벼운 거 아니에요?”
“그런 건 널리 널리 알리는 거야. 그리고, 어쨌든 내가 대학 선배니까. 만약 붙으면 깍듯이 대하고! 알았냐?”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우진은 여러 사람의 응원을 받으며 수능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실수하지 않은 것 같다. 꾸준히 해 온 운동 덕분에 체력도 키웠고, 인강으로 틈틈이 자신의 약점을 채워 나갔다. 학교나 학원에서 허비하는 시간 대신에 고시원에 틀어박혀 우진의 특기인 집중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수능을 마치고,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미경이 시험 끝나면 바로 연락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안 그럼, 지구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겠다나 뭐라나. ‘아우 징글징글한 누나야, 정말.’ 싱긋 웃으며 미경의 번호를 막 누르려는데, 익숙한 부재중전화와 문자가 보였다. 읽고 싶지 않았지만, 스쳐 지나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우진은 아빠의 문자를 열어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