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은 수능 만점을 받았고, 서일대학 의예과에 합격했다. 우진은 편의점 알바 도중에 미경에게 내일 오전에 혹시 시간이 되는지 물었다.
“응, 별일 없어. 지금 방학이니까.”
“그럼, 저랑 어디 좀 가주실래요?”
“으슥한 데 아니지?”
“이 아줌마가 진짜. 사람을 뭐로 보고. 누나가 더 무섭거든요?”
“하하하. 하여튼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다음 날, 헬스장 청소를 마친 우진은 미경과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서울 외곽지역이다. 말없이 내린 우진을 미경은 묵묵히 뒤따른다. 날이 꽤 차갑다. 산밑이라 그런지 매서운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바람도 자아가 있을까?’ 미경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우진은 엄마 이름이 걸려 있는 나무 밑에 섰다. 그 새 많이도 자랐다. 엄마가 그리워지면 더 빨리 자라려나? 대학 합격증을 코팅해서 엄마 이름이 잘 보이는 곳에 걸었다.
“김미경 씨, 결국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됐네. 좋아?”
우진은 그 한마디만 내뱉고는 조용히 나무 밑에 앉았다. 미경은 옆에 나란히 앉으려다 돌아서서 다시 나무 쪽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우진이 아는 누나입니다. 이렇게 인사드리네요.”
미경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진의 엄마에게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름이 같아서였을까? 낯선 그녀의 나무가 미경을 반기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제 하다 하다 나무하고도 말하는 자기 모습이 우습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때 우진이 엄마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나무 쪽으로 다가와 그녀 옆에 섰다.
“엄마, 잘 봐둬요. 내 여자 친구니까.”
미경은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우진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를 한다. 미경은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씩씩거리며 다가갔다. 순간, 그는 미경을 한 손으로 휘감고는 조용히 안았다.
“이제부터 내 여자 친구야. 싫으면 빠져나가 보든가.”
미경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우진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몇 번인가 당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철벽처럼 보이는 우진이었다. 한 번도 우진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여자 친구라니. 미경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들고 장난치듯 우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엄마 앞에서 거짓말하면 안 돼. 귀여워해 줬더니 아주 기어올라라!”
“진짠데?”
미경은 피식 웃었다.
“쪼그만 게, 까불고 있어. 그냥.”
“이제 나한테 기대. 나 누나한테 동생 말고 남자 하고 싶어. 우리 아빠 같은 남자.”
미경은 처음 듣는 그의 아빠 얘기가 더 듣고 싶었다.
“네 아빠는 어떤 분이셔.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친아빠? 아님, 새아빠?”
“아이고, 너도 복잡하구나.”
우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친아빠가 엄마랑 나를 버리고 도망갔대. 엄마는 혼자 날 낳았고, 버리려는 걸 지금 아빠가 말려서 아빠 빈자리, 남편 빈자리를 대신하고 사셨지. 이십 년이란 세월을 그 여자의 뒷모습만 보면서 말이야.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집을 나왔고…. 나는 있잖아. 우리 아빠처럼은 안 살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컷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살래.”
“그래서,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고? 누가 그러래?”
“싫은 사람치고는 아까부터 너무 찰싹 붙어 있는 거 알아?”
미경은 화들짝 놀라 우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다시 그의 팔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우진이 어깨가 꽤 넓구나.’ 미경은 우진의 품에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들었다. 엄마를 생각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심해! 지금 키스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엄마 앞이라서 참는 거야.”
우진은 그녀를 꼭 안았다. 미경은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가 이렇게 미경을 품어 준 적이 있었던가. 아주 어릴 적, 엄마 외엔 없었던 거 같다. 포근한 구름 이불. 미경은 우진에게 기대고 싶었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미경의 얼굴이 방송을 탔다. 화목한 한 가정의 식사 시간이다. 엄마는 생선 살을 발라주고, 아빠는 전복장을 먹으라고 권한다. 미경은 순식간에 4선 의원의 금지옥엽 자랑스러운 딸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방송을 보지 못하고, 평소처럼 집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일상적인 저녁 시간이 시작되었고, 우진도 늘 그렇듯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가던 중이었다.
편의점 입구 종이 요란하게 울리며 덩치 큰 남자가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휘청거리는 것이 만취한 것 같았다. 취객은 우진의 담당이었다. 순간 방심하면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그가 어서 이곳을 나가기만을 곁눈으로 예의주시하며 기다렸다. 순식간이었다. 그 남자가 미경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달려든 것은. 우진은 반사적으로 뛰어들어 그를 막았다. 배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의 손은 우진의 배에 칼을 꽂았고, 그 모습을 본 미경은 비명을 질렀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에, 편의점 안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군가가 112에 신고하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우진의 배에서 칼을 빼 들고 미경에게 다가가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우진은 비틀거리며 다시 그녀 앞에서 그를 막아섰다.
“뭐야. 이 새끼! 저리 비켜! 김미경! 그 자리엔 내가 있었어야 해. 그래야 완벽한 가족이라고! 그런데 왜 그 자리에 네가 앉아 있는 거야? 너만 없었으면, 너만 없었으면! 나도 자랑스러운 아들로 인정받았을 거라고! 네가 내 모든 걸 다 빼앗았어. 알아? 너만 없었더라면, 나도 제대로 살 수 있었다고!”
김형수는 칼을 휘두르며 울부짖다가 갑자기 꼬꾸라졌다. 쓰러지는 그의 뒤로 테이저 건을 든 경찰이 보였다. 미경은 눈물을 삼키며 우진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배를 잡았다. 구급대원이 곧 도착하고, 사장님도 도착했다. 미경은 우진과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우진아! 정신 차려 봐. 응!!”
미경은 벌벌 떨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손은 피로 얼룩져 끈끈해졌다. 구급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사이렌 소리는 더 커졌다. 우진은 미경의 손을 잡은 채 의식을 잃었다.
미경은 우진이 의식이 없는 동안, 말없이 곁을 지켰다. 병실에 놓인 티브이에서는 연일 미경의 가족사가 재조명되어 방송되었다. 민낯이 다 드러난 그녀의 아빠는 그 와중에도 아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벌어진 일이라며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우진의 아빠도 다급히 병원을 찾았다. 본인이 간병하겠다고 했지만, 미경은 자기 때문에 다친 거니 옆에 있게 해달라고 울면서 부탁했다. 그는 매일 찾아와서는 잠시 얼굴만 보고 돌아갔다. 끝까지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여자의 아들을 애태우며 바라보는 아빠와 목적을 위해 자식까지 이용하는 아빠. 모두가 비정상적인 사람들 같았다.
열흘째 되는 날, 우진은 의식을 되찾았다. 대학 입학을 며칠 앞두지 않았는데, 이런 일을 겪게 하다니, 미경은 우진을 볼 면목이 없었다. 우진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경부터 찾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너 바보니? 네가 그걸 왜 물어. 그걸 네가 왜 막아서냐고! 내가 당해야 하는 거야. 내 일이라고. 왜 그랬어. 도대체.”
미경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우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너 지켜준다고 했잖아. 나 되게 빨랐지? 우사인 볼트 같지 않았어?”
“지금 농담이 나오니? 어?”
미경은 우진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 우진을 살폈다.
“하나도 안 아파. 이러니 내가 혼자 둘 수가 있나. 이리 와서, 나 좀 안아주라. 아주 긴 꿈을 꿨어. 그리고, 김미경을 봤어. 엄마 김미경. 거기서도 나를 밀어내더라. 오지 말라고. 참 한결같은 사람이야. 너한테 빨리 오고 싶었는데, 엄마를 보니까 좀 더 있고 싶더라고. 그나저나 얼마나 지났어?”
“열흘이야. 바보야. 내가 너 잘못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이제 뽀뽀해도 되겠다. 나 살았으니까 뽀뽀해 줘.”
마침 의사들이 들어와 더 이상 진행되지는 못했다. 살아나 준 것에 감사했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우진은 되려 그녀의 죄책감을 걱정했다. ‘지켜준다는 말이 이렇게 따뜻한 의미였구나.’ 눈이 뜨거워졌다. 의사들이 우진의 바이탈이며 외상 부분을 확인하는 동안 미경은 살짝 뒤로 물러나 울컥한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의사들이 돌아가자 우진은 형수의 뒷일을 물었다.
“구속 수사 중이야. 이번에도 아빠가 무슨 짓을 해서든 빼내겠지. 우진아, 정말 미안해.”
“괜찮다니까. 나 아직 젊잖아. 이 정도쯤 금방 나아. 나한테 잃을 건 너뿐이야. 지켰으면 됐어.”
“잠깐, 그런데 너 아까부터 계속 너 너 한다!”
“이제 누나라고 안 부를 거야!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이제 불안해서 내가 옆에 딱 붙어 있어야겠어.”
마침 병실에 들어서던 우진의 아빠는 그가 깨어난 기쁨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진은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이제 괜찮다며 아빠를 안심시켰다.
미경의 아빠는 처음엔 아들 편에서 애를 쓰는가 싶더니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오히려 아들의 잘못을 엄벌로 다스려 달라며 읍소했다. 김형수의 최종 판결 내용은 공공장소에서 범행이 이루어진 점, 다수의 목격자와 CCTV 증거 영상이 있는 점, 미리 칼을 준비한 점,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한 점, 존속살해의 목적으로 가지고 범행을 시도한 점, 직접적으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점, 등등의 이유로 5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심신 미약을 주장했지만, 양형 사유에서 제외되었다. 민심은 그녀의 아빠에게 등을 돌렸고, 그의 지나친 욕심은 결국 그의 가슴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빼앗아 가 버렸다. 그는 그 모든 탓을 망나니 아들을 낳은 부인에게 돌렸다. 그를 지탱해 줄 금빛 배지가 없는 이상,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형수의 판결이 있던 날 그는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우진과 그의 딸을 찾아와 사과하지 않았다. 끝까지 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