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정아줌마 Dec 18. 2024

치아바타, 그리고 동굴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

"아, 맞다!"     


다미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블로그 체험단 리스트를 확인했다. 요 며칠 매일 같이 다녀서인지 제법 있던 체험권도 두 군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람 이상 방문해야 하는 식당 체험권과 이용 날짜가 오늘까지인 빵집이었다. 갑자기 부를 사람은 없었다. 빵집 체험권을 선택하고 나머지 한 장은 다녀와서 고민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곳은 갈 일이 없을 테지만 말이다.     


'느린 빵집 블로그 체험단에 선정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3만 원까지 이용 가능하고, 솔직한 맛 평가를 블로그에 포스팅해 주시면 됩니다.'     


"솔직한 맛 평가라…. 과연 그렇게 해도 될까?"     


다른 이의 선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소위 맛집 감별사로서 솔직하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하자 쓴웃음이 났다. 많은 블로거들의 릴레이 칭찬에 다미 역시 기대를 안고 찾았던 곳이 블로그 내용과 사실은 다를 수도 있다는 충격을 받은 건 비단 그녀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로 수익을 내는, 이른바 파워블로거다. 양심이 조용히 다가와 노크할 때도 있지만 돈 앞에 양심 따위는 잠시 안녕이다. 이번에도 대충 '최애 맛집' 등의 수식어와 보정 사진으로 도배하면 된다. 잠시의 수고는 그녀에게 3만 원의 빵 이용권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와 또 다른 수익을 안겨 준다. 찜찜함은 털어내 버리기로 했다. 유명한 가게마다 수많은 블로거의 평가가 달려 있다 하필,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다미의 블로그를 고른 그들이 잘못이지,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 끼도 넣지 못한 뱃속에서는 민망할 정도로 꼬르륵 소리가 울려대고 있었다. 파워블로거라고는 하지만, 수입이 많지 않아 아르바이트로 보조작가 일을 해왔는데, 지난달에 그만두었다. 제작사 형편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고정 수입이 끊긴 상황이 되자, 지출을 어떻게든 줄이는 쪽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인기 있는 블로그를 운영하지만, 월세 이상은 힘들었다. 보조 작가로 일하는 동안은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던 체험단을 최근 매일 하다시피 하다 보니, 그마저도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멍청하게 확인했어야지. 아까워.”

혼자서도 가능한지 여러 번 확인한 후 급하게 이곳저곳 체험단 신청을 해 두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늘 저녁까지 포스팅하려면 조금 빨리 서둘러야 한다. 집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낯선 동네에 있는 빵집. 빵을 좋아하는 다미는 입맛을 다시며 집을 나섰다.     


50분 가까이 버스를 타고 내린 곳에서 구글로 주소를 찾아가던 그녀는 구글 지도를 닫고, 다른 지도 앱을 열었다. 그 역시도 도무지 상권이라고는 있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목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아, 낚였어? 그 새 망한 거야?'     


이미 배고픔은 물러나고, 낯선 곳에서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처럼 어쩔 바를 몰라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3만 원어치보다 더한 화가 속에서 디밀어 올라왔다. 공짜를 바라서 온 건 아니다. 이것도 그녀의 일이었다. 나름의 대가임이 분명한데도 자기 처지가 계엄령이 선포된 황망한 거리에 구걸하러 나온 거지가 된 것 같은 처량함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골목만 한 번 더 돌아보자. 에이, 오늘은 그냥 집에 있을걸. 배달시켜 먹고 말 걸 그랬어.'     


기대가 후회로 덮이려던 찰나, 바람에 실려 온 익숙한 밀가루 냄새에 지도가 아닌 코가 먼저 나대기 시작했다. 지도로는 결코 찾지 못할 곳에 그 빵집은 있었다. 간판도 없었고,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빵집이라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외관을 가진 상점이었다. 다미는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이런 곳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악플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솔직한 맛 평가…. 그래, 솔직하게 쓰면 되지 뭐.’ 이미 도파민을 움직이기 시작한 빵 냄새는 그녀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손이 먼저 나가고 발은 따라갈 뿐이었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느린 빵집 맞나요?"     


"네,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보시다시피 거의 다 팔려서요."     


아닌 게 아니라 빵집 매대 위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빵은 흔적을 감추었고, 원래 어떤 빵이었을지 상상도 안 되는 칸들도 제법 있었다. 가득 쌓여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입맛만 더 돌았다.     


"아, 저 블로그 체험단으로 왔는데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아, 어서 와요. 안 그래도 오늘까진데 안 오시길래 저희 가게가 너무 작아서 그런가 보다 했네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사진도 좀 찍어야 하는데…."     


"네, 얼마든지요. 빵이 얼마 안 남아서 아쉽네요. 봉투에 빵 담아 오시면 됩니다."     


"여기선 먹을 수가 없나요?"     


"보시다시피 공간이 없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솔직하게 글 남겨주시면 되니까 부담 가지지 마세요."     


다미는 빵집 주인장을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흰머리가 그의 나이를 어림하게 해 주었지만, 묘하게도 얼굴은 이십 대처럼 생기가 돌았다. 마치 20대 청년이 흰 가발을 그것도 아주 잘 어울리는 가발을 쓰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살짝 본다는 게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사진을 찍는 척 열심히 좁은 가게 안을 부산하게 움직였다. 빵 사진은 집에 가서 다시 찍어도 되겠다 싶어서 눈에 가는 것들을 담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가격 표시가 없었다.


"저기 사장님, 가격 표시가 없어서요. 어떻게 하면 될지…."     


"그냥 마음껏 담으세요. 가격은 제가 결정해요."     


'치, 그래 놓고 돈 더 받으려고. 한두 번 속아봤어야지.' 그녀는 어림잡아 3만 원이 넘지 않을 정도에서 빵을 골랐다. 계산대를 향하던 그녀는 팔뚝만 한 기괴한 모양의 빵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사장님, 이건 무슨 빵이에요?"     


"아, 그건 치아바타라는 빵이에요. 혹시 알아요?"

    

"네, 알죠. 그런데 이렇게 큰 건 처음 봤어요."     


"아마도 여기뿐일 거예요. 저도 하루에 하나밖에 못 만들어요."     


'맛이 없나 보네. 다른 빵들은 거의 다 팔렸는데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빵집 주인은 그녀에게 하나밖에 없는 빵을 내주었다.     


"오늘은 주인이 없으려나 봐요. 이거 가져가세요."     


이걸 담으면 3만 원이 넘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체험권 이상 계산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전 이걸로 충분해요."    

 

"치아바타까지 하셔야 3만 원이 꽉 차는걸요? 그래야 체험권 다 쓰시는 거예요."     


그녀는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충분합니다. 괜찮습니다. 양이 너무 많아서요. 그건 다른 분께 양보할게요. 오늘 안으로 포스팅 꼭 올리겠습니다."     


"아쉽네요. 제 치아바타 꼭 맛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다미는 공손하게 빵 봉투를 받아 들고 집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빵 냄새에 한 번씩 돌아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혹적인 향이었다. 대부분 투박한 모양의 빵들이지만 발효 빵에서 나는 독특한 효모 향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빨리 집에 가서 빵 봉투를 열고 치킨을 뜯듯이 와그작와그작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노트북을 치우고 빵 봉투를 열었다. 그런데, 분명히 거절했던 치아바타가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빵 냄새에 참지 못하고 버스 안에서 한 번 열어봤을 때도 없던 빵이 집에 오자 마술처럼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멍이 송송 뚫린 걸 보니 기공이 잘 만들어진 빵이다. 발효가 잘된 빵임이 눈으로도 보였다. 빵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지만, 맛집 블로거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가지고 있다. 쫄깃하고 담백한 맛을 상상하며 입속에 곧장 집어넣었다. 그리고, 씹으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뺨에 푹신한 느낌과 동시에 물기가 느껴졌다. '이게 뭐지?' 그녀는 축축한 곳을 더듬어 손으로 쓱 닦았다. 정신을 차리고 본 주변은 깜깜하고 고요했다.      


"빵 꿈꾸고 침 흘린 거야? 지금? 미치겠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그새 몸은 따뜻한 이불속에 들어와 있다. 본능적으로 아는 건가. 엄마 품과 닮은 이불속. 포근하고 따뜻한 곳.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치아바타의 향기.     


그녀는 곧바로 일어나 창문을 걷었다. 정오였다. 어젯밤 단편소설 하나를 쓰다가 포기하고 드라마를 보다 잠든 게 생각났다. 언제까지 보조작가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글 쓰는 게 재밌으면서도 이 일로 벌어먹고사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매년 도전하려고 쓴 글, 결국 부치지 못한 원고들만 그녀의 노트북에 가득 들어있었다. 올해도 결국 노트북 속에서 잠들고 말겠지. 현실을 직시하기도 전에 허기가 몰려왔다. 빵 꿈 때문인지 치아바타가 너무 먹고 싶었다. 다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에 느린 빵집을 검색해 보았다. ‘그럼 그렇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근처에 다른 치아바타 맛집을 검색해 보기로 했다. 막 검색어를 치아바타로 바꾸려는데 느린 빵집이라는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딱 한 명 있었다. 그곳을 다녀온 블로거가.      


‘느림의 빵. 치아바타를 만드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기로 했습니다.’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지? 그녀는 그 포스팅 내용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젯밤 꿈에서 본 곳과 너무나도 똑같은 곳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점퍼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곧 12월이다. 그녀의 신춘문예 도전도 일주일이면 내년을 다시 기약해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홀린 듯이 그곳을 찾았다. 꿈에서 탔던 버스를 타고 꿈에서 걸었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골목을 돌아 빵집 같지 않은 그 빵집의 문을 조용히 열었다. 흰머리 사장님!     


“어서 오세요. 빵 사러 오셨어요?”     


“네? 네, 빵 말고 다른 것도 있나요?”     


“오늘은 빵 만드는 수업이 있는 날인데 예약한 손님이 아직 안 오셔서요. 혹시 안나 님이신가요?”    

 

“아뇨, 저는 김다미입니다. (안나는 제 필명이긴 한데…). “  

    

차마 블로그를 하는 사람이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연락처가 이메일밖에 없어서 오늘은 수업을 못 하겠네요. 아, 빵 사러 오신 거죠? 천천히 골라보세요. “     


”저기, 사장님. 그 체험이라는 거요. 혹시 제가 해도 될까요? “     


”시간이 있으세요? 하루 종일 걸릴 수도 있어요. 대여섯 시간 정도는 집에 갔다가 오셔도 되고. 아마 안나 님도 시간 때문에 못 오시는 거 같아요. 낯선 곳에서 낯선 남자와 24시간이 부담스러울 수도. 치아바타는 기다림의 빵이거든요. 저는 믹싱기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좀 더 걸려요. 그리고, 한 번에 크게 만들어서 나누어서 팔죠. 매일 만들기가 힘들어서요. 저도 이제 육십에 이른 나이가 되다 보니…. “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으며 가게 안을 살펴보니 꿈에서 보았던 팔뚝만 한 치아바타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만들어 내일 팔 모양이었다. 벽에 보니 파리세계베이커리 대회에서 우승한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은 사장님의 사진도 있었다.      


”사장님, 저 배워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     


시간은 차고 넘쳤고, 치아바타는 좋아하는 빵이다. 이번 기회에 만드는 법을 알 수만 있다면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됐네요. 제 기술을 물려줄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무료 강의를 하는데도 예약자가 없어요. 오랜만에 예약을 해 주셔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미 씨라고 하셨죠? 여기 앞치마 드릴게요. “     

그때였다. 가게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 다미 또래의 여자가 휠체어를 끌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휠체어 바퀴를 돌리는 건 그녀의 팔이 아닌 기계장치였다.     


”제 딸 클로이예요. 선천성 기형이라 팔이 없죠. 제 딸이 너무 배우고 싶어 하는데 할 수가 없으니, 제가 빵을 만들 때마다 나와서 지켜보곤 해요. 불편하시면 들어가라고 할게요. “     


”오히려 좋은데요. 처음 뵙는데 둘만 있으니 살짝 부담스럽긴 했거든요. “  

   

다미는 그제야 농담 한마디 던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와 그녀는 오랫동안 파리에서 살았다고 했다. 한국어가 능통하지 못한 딸은 영어와 불어를 섞어가며 다미와 소통했다. 쾌활하고 멋진 친구였다. 다미보다 두 살이 많았고, 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손은 없지만, 우아했다. 표정과 몸짓이 정상인 다미보다 더 정상인처럼 보였다.   

   

치아바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너무 간단했다. 강력분과 물, 소금, 이스트 그리고 시간. 반죽하고 믹싱하고 기다리고, 왜 그 블로거가 느림의 빵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빵집 사장님은 다미가 불편할까 봐, 발효되는 시간에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클로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미는 낯선 이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미도 프랑스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는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미 씨, 저 흉측해 보이나요? “     


한참 즐거운 대화를 나누던 중에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니라고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당황한 것이지 답에는 거짓이 없었다.    


”괜찮아요. 느껴져요. 다미 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많이 봤거든요.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 저는 그들에게 어떤 짓도 하지 못하는데 말이죠. “     


”속상하지 않아요? “     


”전혀요. 저는 저대로 잘살고 있거든요. 손이 있으면 좀 더 빠르겠지만, 그림 그려요. 손이 없어서 입으로 때론 발로 그리죠. 내년에는 전시회도 할 생각이에요. 파리에선 한 번 했었는데 아직 한국에선 못 해봤어요. 편견이 아직 많네요. 받아주는 미술관도 없고. 몇 번 문의하다가 아빠가 화가 났는지 자비로 하자고. 빵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고 생각을 안 하시는 분인데, 그래서 블로거 체험단도 모집하고 안 만들던 빵도 만들고 그러셨나 봐요. 사람들은 건강한 빵을 좋아하지 않나 봐요. 근처에 사는 외국분들이나 단골분들만 오셔서 사가세요. 가끔 한국식 빵을 원하시는 분들도 계셔서 그런 스타일의 빵도 요즘은 만들지만, 치아바타만큼은 정통으로 만들고 계세요. “     


”저는 치아바타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빵인지 몰랐어요. “     


”보통은 저희 아빠처럼 안 만드니까요.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치아바타일 거예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 “     


그녀와 수다를 떠는 동안 사장님은 빵의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다시 믹싱 하는 걸 알려 주었다. 그리고, 다미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메모했다. 맛집 포스팅을 위한 사진이 아니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쓰다만 소설을 생각했다. 잠시 사장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미는 클로이를 보며 물었다.    


”클로이, 저 뭐 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     


”중요한 질문이에요? “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클로이 눈엔 제가 뭐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     


”글쎄요, 그게 중요할까요? 그건, 중요하겠네요.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는지. “  

   

”좋아는 하는데 실력이 없어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보려고 도전해 보고는 싶은데 실패할까 봐 늘 주저해요. 올해도 그렇게 될 것 같고…. 한심하죠? “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만약 실패가 두려워서 주저한다면 한심해요. 너무나. 저희 아빠는 마약 중독자였어요. 엄마도. 제 팔이 없는 이유 설명이 되죠? 뇌와 척추에 이상이 없어서 그나마 일찍 죽지 않고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어요. 비록 팔은 없지만. 저 태어나고 얼마 뒤에 엄마가 약물중독으로 죽었대요. 그때 아빠가 정신을 차린 거죠. “   

  

그때, 반죽을 살피러 다시 온 사장님은 클로이의 말에 ‘또 그 얘기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한 뒤 발효의 진행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메모하는 손과 달리 머리는 온통 좀 전에 클로이가 한 말로 가득 차 있었다.     


”집중해야 하는데…. 저 녀석, 괜한 말을 해서, 무서워하지 말아요. 완전 손 씻은 지 삼십 년이 넘었으니까. 오래된 이야기인데 저에게 빵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스승님이 저에게 기다리는 법을 알려줬어요. 쉽지 않았어요. 작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렸죠. 그때마다 이 치아바타가 완성되는 시간까지만 버텨보라고 하셨어요. 지금처럼 만 하루였죠. 일 년 가까이 금단과 유혹에 시달렸어요. 첫 치아바타를 만들었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때 스승님이 하신 말씀도.

 ‘치아바타는 완성된 빵 안에 얼마나 많은 동굴을 만들었느냐로 잘 만든 빵인지 아닌지가 판단되고, 동굴은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며 넌 그 기다림을 잘 이겨냈다.’…. 고... 오늘 우리가 만든 빵도 아마 멋진 동굴 여러 개가 만들어질 거예요. 다미 씨가 진심으로 임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긴 시간 기다리면서 말이죠. “     


사장님은 간단한 먹거리를 좀 가지고 오겠다며 다시 사라졌다. 다미는 클로이와 마주 보고 앉았다.     


”클로이, 졸리지 않아요? “     


”너무 행복한 시간이에요. 전혀요. 다미 씨 힘들면 소파에 좀 누워서 쉬어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   

  

비장한 표정으로 다미를 바라보는 클로이를 보자, 웃음이 났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노트북에 잠들어 있는 그녀의 글들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나는 뭐가 무서웠을까? 실패? 사람들의 시선? 아니면 가난한 작가라는 타이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밤새우는 일은 잦은 일이다.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밤새는 일은 허다했다. 어제도 그랬다. 지지부진한 소설을 이어가다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보기 시작한 드라마에 밤을 꼴딱 새우고 해가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 느린 빵집의 꿈을 꾸었다. 진지해진 다미의 얼굴을 보고 클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다미의 생각을 멈춘 건 어디선가 풍겨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였다.     


”다미 씨, 이것 좀 먹어봐요. 어디 가서 못 먹는 진짜 기가 막히게 맛있는 스튜거든요. 살짝 매콤해서 술을 부른다는 게 흠이라 그렇지. 이거는 어제 만들어 둔 바게트인데 스튜를 찍어서 같이 먹어봐요. 괜찮을 거예요. “     

한 끼도 못 먹었던 터라, 다미는 흡입하듯이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녀의 먹는 모습에 클로이 부녀는 흐뭇한지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발효 과정이 끝났다. 반죽에 덧가루가 뿌려지고, 기다림의 반죽은 예열한 오븐으로 조심스럽게 입장했다. 곧이어 맛있는 빵 냄새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천상에 와 있는 기분마저 들게 만들었다.      


”자, 봅시다. 다미 씨의 동굴은 몇 개나 만들어졌는지. “


한 김 식힌 치아바타는 곧 사장님의 익숙한 빵칼에 속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믹싱과 느린 발효로 발생한 기공은 치아바타 내면에 크고 작은 동굴을 만들어 냈다.  

   

”멋져요. 너무…. “


다미는 감탄했다. 느림은 못남이 아니었다. 느렸기 때문에 완벽할 수 있었다. 다미는 그 감정을 노트에 메모했다. 그리고, 클로이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 들고 사장님께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급히 되돌아왔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노트북에는 그동안 보내지 못한 수많은 글이 남아 있었다. 남들 눈에 어설퍼 보이고, 답답해 보일지라도 그녀는 그녀만의 시간을 걸어보기로 했다. 실패할 것이다. 그럼, 또 내년이 있지 않은가. 이틀 밤을 꼬박 새운 다미는 출력한 글들을 봉투에 넣어 봉해버리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다섯 군데에 각각 다른 응모작을 출품했다.      


”클로이, 나 시작했어요. 느리게 살기. 이제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내일 나랑 맛집 가지 않을래요? “     


클로이는 흔쾌히 응했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온 다미는 느린 빵집에 대한 포스팅을 작성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느림의 빵. 치아바타를 만드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기로 했습니다. 인생 최애 빵집! 일찍 오셔도 못 드실 수 있어요. 때가 있거든요. 치아바타가 완성되는 때가.’



PS. 지난 주 연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차차,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른 매거진을 통해서 풀어보겠습니다. 늘 부족한 글 읽어봐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