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오늘도 업그레이드 중이다.
명절 연휴가 무사히 지났다.
나는 이제 며느리로 할 일도 없고, 긴 연휴를 맞아 기뻐야 하는데도 명절이 살짝 두렵다. 우리 엄마는 아직 명절에 음식을 하시기 때문이다. 제사도 안 지내는 집인데도 불구하고, 50년째 명절마다 집에 각종 튀김류와 나물, 생선, 에레이~갈비가 준비된다. 그리고, 그놈의 레퍼토리!!!
"며느리라도 있으면, 같이 할 건데. 혼자 대 죽겠네."
그래서, 재작년부턴가 명절마다 전날 가서 엄마 음식을 돕는다. 그래봤자, 자리 깔고 앉아서 노가리나 까면서 엄마가 다 장만해 둔 전거리들을 뒤집는 일밖에 안 하지만, 그게 뭐라고 좋아하는 엄마를 보니 소소한 재미가 있긴 하다. 그래도, 하기 싫은 건 싫은 거다. '엄마, 제발 올 추석엔 좀 사 먹자!!!!!!'
작년부터 동생도 시간이 맞으면 같이 음식을 한다. 정리정돈에는 일가견이 있으나, 음식엔 젬병인 동생. 심지어 변사자를 들여다보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녀석이 죽은 새우가 튀기는 물은 무서워서 중무장을 하고야 프라이팬 앞에 앉는다. 나는 맨살에 팔 걷어붙이고 뒤집는데 말이다. 주부 경력 20년 무시할 게 아니다.
올해도 역시 원가를 뒤집어쓰고 나타나겠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와 나는 동시에 웃음부터 터졌다.
"야, 뭐고 이게?"
"튀는 거 무섭단 말이야."
나참, 한참 웃다 보니 명절 음식 준비가 끝났다. 당일날 온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과 명절 추억 하나가 더해진 건 당연지사. 엄마의 수고는 늘 가족을 모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힘이 있다.
지금 동생은 성장통을 겪고 있다. 아니, 그보다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기름에 데인 상처는 아물면 끝이지만,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평생 남아 괴롭힌다. 태생이 여리고 이타적인 아이라 베풀고 뒤통수 맞는데 달인이다. 그녀가 조금 달라지려고 노력 중이다. 명절에 대비하는 차림새도 그렇지만, 남은 인생에 이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 다시 마인드맵을 만드는 과정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혼자 긴장하고 고뇌하고 아프고 힘든 모양이다. 하지만, 외면하지 않고 자신을 조금 바라보고 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 잘 살자."
그녀의 한 마디에 내 마음이 먹먹해지는 건
그녀의 진심이 세상에 통하지 않는 데 대한 화이기도 하고,
그녀의 유쾌함을 몰라주는 이들에 대한 원망이기도 하고,
그녀의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주변에 대한 미움이기도 하고,
그녀의 아픔을 나눌 수 없는 나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너랑 싸워서 이겨야지."
내가 내뱉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빌어먹을, 자신과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 나랑 싸워야 하지?'
주변에 나와 싸우겠다고 덤비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굴엔 친절을 가장하고, 나의 약점들을 공격의 무기로 삼는 이들과 싸워도 남는 힘이 없는데 왜 자신과 싸워야 하나. 그냥 나는 있는 그대로 안아주고 보듬어 주면 안 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둬도, 나 하나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나는 정말 그녀를 위해서 자신과 싸우라고 했던 걸까?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 또한 핑계라는 말을 에둘러했던 건 아닐까?
밤새 그 한 마디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답을 들으며,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에 마음에 담아둔 글귀들을 떠올리며....
나는 나와 싸울 필요가 없다. 이기고 싶은 대상이 나라면 더더욱 의미가 없다.
이 가혹한 세상에서 나 하나만큼은 나에게 져줘도 되지 않을까? 건강을 해하는 일만 아니라면, 나를 함부로 대하는 일만 아니라면, 내가 나에게 진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고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어야 한다. 일부 드러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진짜 정신질환자들은 정신병원에 다니지 않는다. 남에게 함부로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으며, 소시오패스인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지, 극단적 이기주의를 가지고 있는지, 자기의 말이 타인에게 비수가 된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 입고, 그렇게 마음에 큰 구멍이 난 사람들만 병원을 찾는다.
오롯이 안아 주자.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나라도 안아 주자. 남들 눈에 어찌 보이든 말든 내가 편한 대로... 상대에 맞춰 살다 보면 무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기대치는 계속 높아질 것이고,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임을 자연스레 알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업그레이드 중이다. 내면적인 건강함을 찾기 위해, 아마도 혼자 많은 갈망을 이겨내야 할 것이고, 번번이 무너질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서 돌부리를 만나고, 그 돌부리 하나를 걷어내는 것일 뿐이라고 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조금 편하게 걸어가기 위해서, 잡초를 뽑고, 길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어렵지 않게 그녀의 길이 업그레이드되길.
그리고, 내가 했던 말들을 용서해 주길.
"은우야! 너는 너와 싸울 필요가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