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정도 남았지만 계약 단계에서 일이 좀 꼬이기도 했고, 집 사이즈가 반으로 줄다 보니 대부분을 버려야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다. 아직은 멀쩡한 소파며 책상이며 침대 등등.. 하나하나 버릴 품목들을 정하고 보니 허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진짜 폭삭 망했거나 뭔가 잘못돼서 작은 집으로 이사 가는 거면 너무 비참할 거 같은데 다행히 내년 새집 입주에 대한 기대로 그나마 버티고 있다. 아직은 그림의 떡인 새 가구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말이다.
묵은 짐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행운들이 생긴다.
엊그제는 서랍 정리를 하다가 만 원짜리 하나를 발견했다. 결국 내 돈이었거나 남편 돈이었을 텐데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조우한 만원은 꽤나 반갑다.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동전에 심지어 반지도 있다. 보물찾기 하는 것처럼 다음에는 뭐가 나올까 기대감도 생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의 유치원 때 작품들이며 사진들까지.. 계속 쏟아져 나오는 옛 물건들에 짐 정리는 뒷전이고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랍 속 추억 보따리를 풀어보던 중 익숙한 글씨가 쓰인 하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봉투만 봐도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때의 기억이 이렇게나 선명하다니. 그런데 어쩌면 지난 수년간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그때의 감정과 기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알록달록 생생하게 그날의 기억이 그려진다. 몇 년 만에 다시 꺼내본 아이의 편지는 7년 전 그때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큰 아이는 편지를 자주 써줬다. 혼이 났을 때, 기쁜 일이 있을 때, 또 엄마 아빠의 생일 때에도..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받고 혼자서 많이도 울었었는데.. 혼내고 돌아서 화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때 아이의 반성문 같은 편지를 읽고 얼마나 부끄러웠었는지. 그렇게 아이 덕에 어른이 되어갔는데 그 기억들을 깡그리 잊고 있었다.
이 편지를 받고 나도 답장을 했다. 아이는 이 두 편지를 봉투에 넣어 고이고이 보관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나는 과연 아이에게 본이 될만한 엄마가 되었을까?
며칠 전 기숙사에 있어야 할 아이가 연락이 되지 않아 두 시간 정도 애를 태웠다. 무턱대고 기숙사에 전화를 해보려니 그건 너무 앞서간다 싶어 한참을 아이와 연락이 닿길 기다렸다. 2시간 후에야 연락이 된 아이가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고 있어서 전화 오는 걸 몰랐다기에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잠시 후, 사실은 친구들이랑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며 이실직고를 한다. 엄마가 알면 혼낼게 뻔해서 거짓말을 했다며 죄송하다고 말이다.
앞뒤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줄 텐데 왜 거짓말을 한 걸까? 내가 하교 후 기숙사에 가면 바깥에 나가지마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터라 아이가 지레 혼날까 봐 본능적으로 살기 위한 거짓말을 한건 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이 아이에게 어떤 엄마일까?
7년 전 내가 되고 싶었던 엄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아이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신뢰를 쌓으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아이에게 어떤 신뢰를 주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엄마였던 모양이다. 하지 마라고 하기 전에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통통거리며 뛰어다닐 나이의 아이 발을 묶어두곤 내 걱정만 덜려고 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엄마인지.. 추억 보따리 풀다가 반성 모드다.
주말에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쭈뼛쭈뼛 다가온다.
"이 녀석아, 친구들하고 노는 게 뭐 잘못 이가? 대신에 나가고 들어오는 건 엄마가 알아야 하지 않겠나? 엄마 손이 안 닿는 곳에 있으니 적어도 엄마가 안심은 돼야 하잖아. 앞으로는 잠시 나갈 때 톡으로 행선지만 알려줘, 그리고 돌아오면 왔다고도.. 알겠지?"
그제야 환하게 웃는 아이. 그리고는 학교 친구들 얘기며 친구의 짝사랑 얘기, 또 호감 가는 남자 친구에 대한 얘기까지 술술 풀어놓는다. 결국 그 날 아이와 나 사이의 문제는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의 부재 때문이었다. 나도 아이도 서로의 입장에서 조금만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사소한 문제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7년 전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서 며칠 전 아이와의 신경전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자식을 키운다는 건 가슴 뭉클한 감동도 있지만 부모로서의 책임도 따른다. 그 핑계로 혼자서 경험하고 쌓아야 할 아이만의 시간을 무시하고 '무조건 안돼, 위험해, 그건 틀렸어'로 내가 정해논 바운더리 안에서만 키우려고 한 건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7년 전 그날의 편지처럼 처음 아이의 존재를 알았을 때의 초심을 잊지 말자고 조용히 되내면서 어리석은 엄마는 또 한걸음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