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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Jan 28. 2023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위해 정신과를 다녀왔습니다.

이틀을 못 잤습니다. 뭐 못 잘 수도 있죠. 지금 현재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오래된 습관이고 만성적 불면증이 이제 병적인 수준까지 도달했다 뭐 그런 것일 뿐. 동생의 오랜 우울증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선뜻 내 발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한 번 병원에 발 들이면 나도 저렇게 오랫동안 병원에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요즘 나를 부정하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어서일까요? 당연했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그동안 내 습관들 하나하나 문제 투성이구나. 난 왜 이따위로 살았던 거지? 후회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잠이 안 오면 술 마시면 되지, 그렇게 반복하며 살다 보니 일상이 되어버렸더라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부지 닮아서 술이 좀 센 편인 데다가 정해진 양 이상 먹지 않는 술버릇 때문에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은 남편도 옆에서 거들었어요. 잠 안 오면 마시고 자라고 말이죠. 


자극이 익숙해지면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마련이잖아요.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알코올 의존증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죠. 자고 못 자고 반복되는 일상에 일정량의 술로도 잠을 자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는데 나를 부정하는 연습이 그런 나에게 그건 옳지 않아라고 말해 주는 거 같았습니다. 나에게만 특히 관대했던 거였습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나는 괜찮아라고 용납해왔거든요. 이제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집에서 가까운 병원을 검색해 봅니다. 이렇게나 정신건강의학과가 많다고? 놀랄 정도로 내가 사는 인근에만 병원이 일곱 군데나 됩니다. 어떻게 선택하지.. 한 곳은 딸아이가 잠시 다녔던 곳이라 일단 패스, 너무 기다려야 하거든요. 나는 그렇게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지라 아이의 일이라면 몇 시 간인들 기다릴 수 있지만 내 문제는 또 다릅니다. 또 한 곳은 동생에게 무지막지하게 약처방을 했던 곳이라 패스. 가깝고 환자가 없을 것 같은 자그마한 병원으로 선택했어요.


진료 시작하기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다섯 분이나 와서 대기 중이십니다. 아, 병원을 잘 못 왔나.. 또 기다려야 한다고? 순간 나갈까 고민에 빠졌어요. 그렇지만, 다시 병원을 검색하고 이동하는 거보단 그냥 있는 편이 낫겠다 싶어 일단 접수하고 기다립니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정신과라서 그런지 여타 다른 병원들보다 아늑하고 뭔가 편안합니다. 좋은 아로마향이 대기실에 은은하게 퍼지고 적절한 습도도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조명까지도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딱 알맞은 느낌입니다. 첫인상이 좋았어요. 이런 컨디션이라면 기다리더라도 괜찮겠다 싶은 거죠. 


정신과에서 처음 만난 간호사분도 친절합니다. 세세한 병원의 운영사항들을 알려주고 미리 대기시간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짜증이 날려고 해도 친절한 간호사 때문에 참아야 할 것 같아요. 머리가 멍하고 아파서 사실 말하는 내용이 머릿속에서 웅웅대고 기억에 남지는 않아요.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더니 곧 제 이름을 호명합니다. 


'저 미소는 자영업자의 미소일까? 친절한 의사의 미소일까?'

들어가자마자 마주하는 담당 선생님은 얼굴 전체가 1년 만에 만나는 절친을 대하는 듯한 표정이에요. 그 모습에 처음 대면하는 정신과 의사에 대한 경계심이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쭈뼛쭈뼛 자리에 앉자 불편한 게 뭐냐 물어보십니다. 잠을 못 자요. 여차저차 제 상황만 대충 말을 합니다. 1년 이상 지속된 불면증이면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데 그럴만한 원인이 될만한 게 있느냐 물어봅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어요. 사실 이유야 있죠. 너무 많아요. 그걸 일일이 말하기엔 내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잘 모르겠다 재차 말하니 선생님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아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자. 단지 긴 불면증엔 분명 원인이 있고 그걸 들여다보는 치료를 해야 완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말이죠. 적절한 안타까움과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로 일단 잠을 자는 게 우선이니 잠을 잘 수 있도록 아주 가벼운 약으로 처방을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구세주를 만난 거 같았어요. 그제야 선생님의 웃음이 친절한 의사 선생님의 미소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단, 오늘은 잠을 잘 수 있구나.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어요. 4일 치의 처방을 받아 들고 다음 주 진료 예약을 하고 나왔습니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 들고 나오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어요. 오늘은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겠지. 그렇게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첫 정신과 약을 먹고 밤 10시 숙면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두통약을 한 알 털어 넣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네요. 오늘은 운동도 지나치기로 합니다. 그럴만한 컨디션이 아니거든요.

10시에 먹은 약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3시간 정도 본인의 역할을 했을 뿐, 결국 2시부터 5시까지 선잠을 잔 채로 첫 기대는 끝이 나버렸어요. 


아마도 약이 용량이 너무 적었나 봅니다. 신경안정제도 그다지 듣지 않은 걸 보면 제 몸이 굉장히 각성되어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어요. '아, 이래서 심각한 불면증 환자들이 프로포폴 유혹에 빠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약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오늘 밤은 좀 약빨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한 발짝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고 있는 제 자신이 기특합니다. 뭐 남들은 그게 뭐라고 병원 한 번 간거가지고 대단한 척하느냐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겐 큰 결정이었거든요. 누구에게나 그런 거 한 가지쯤은 있지 않겠어요? 변화의 힘을 기대해 봅니다.






PS. 가끔 동생의 안부를 물어봐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동생은 원하던 근무처에서 아주 행복하게 본인의 일을 즐기면서 하고 있습니다. 혼자 살이도 끝내고 본가로 들어갔고 병원도 옮기고 건강해졌어요. 다시 한 번 걱정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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