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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반납, 연장, 예약

by 설다람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읽는 내내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뉘우치기에는 넘긴 페이지가 제법 되었다. 늦잠을 잔 것부터가 문제였다.

일찍 깨기에 아까운 꿈이었다.


책을 꺼낼 때마다, 서가에 새로운 책이 생기는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책들의 날이면 쉬는 다른 도서관과 다르게 지역 대표 공공도서관이란 이유로 우리 도서관은 문을 열었다. 퀴퀴한 책 냄새에 절여진 채 생을 마감하고 말 거라는 위기감이 손목과 발목을 잡아 뜯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총류 서가로 가 있는 대로 책을 꺼내 북트럭에 집어던졌다. 이렇게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여기에 꽂힌 빌려간 지 오래된-근 10년간, 이 기록은 매년 경신될 것이다-책들 중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이 책들이 소외된 건, 발버둥 치지 않아서였다.

운 없게도 천장으로 책을 던지고 있을 때, 관장이 나를 찾아왔다. 업무가 불만족스러우면, 만족스러운 직장을 찾게. 이번에 계약이 갱신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밤 아홉 시, 열람실을 모두 소등하고 나오니, 짙은 남색으로 칠해진 듯한 얇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높은 언덕에 세워진 도서관의 별명이 ‘바람의 도서관’인 것은 근거 없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버스 파업 때문에 자동차 도로가 손톱만큼 양보한 인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 고개를 지나고 있을 때, 뒤에서 자전거 종이 울렸다. 토끼 헬멧을 쓰고, 전기 자전거를 탄 여자가 속도를 줄이고 옆으로 왔다. 엄지로 뒷좌석을 가리켰고, 너구리 헬멧을 건네주었다. 거절할 수 없는 호의였다.

부탁하지 않았지만, 토끼 헬멧 여자는 집 코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핸들을 돌려 떠나면서, 토끼 헬멧 여자는 ‘매일 배움 카드’를 내게 던졌다. 여자는 청년 결사대 대원이었다.

다음날 검은 양 서식지에 있는 지하 스터디 벙커를 찾아갔다. 입구에서 매일 배움 카드를 찍으니, 문이 열렸다. 지하 4층 401호실로 들어가니, 토끼 헬멧을 벗은 토끼 머리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도 없이, 여자는 당근은 2개인데, 토끼는 –1마리일 경우 토끼가 자손을 나을 경우의 수를 구하는 법을 화이트보드에 썼다.

-1마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간식으로 나온 생강당근쿠키는 맛있었다. 식을 써 내려가던 여자가 생강당근쿠키만 먹고 있는 나를 보고, 지금이 쿠키 먹을 때냐고 했다. 확실히 지금은 청귤차를 마실 시간이긴 했다.

쉬는 시간 방을 나와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청귤차 두 캔을 꺼냈다. 가격이 바깥보다 저렴해, 나가는 길에 몇 개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중앙 라운지를 둘러보고 오느라 수업에 조금 늦게 들어갔다. 토끼 머리 여자는 약간 뿔이, 아니 뿔처럼 생긴 토끼 귀가 나있었다.

멍청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지만, 게으른 건 당신 잘못이에요.

청귤차로는 막을 수 없는 꾸지람이었다.

야단을 맞을 때면, 은근히 달콤한 기분이 든다.

지금 듣고 있어요.

아무렴, 듣고 있죠.



결사대 훈련을 모두 마치고, 토끼 헬멧 여자와 격렬하게 작별을 나누었다. 펑펑 우는 게, 실은 정 많은 사람이었나 보다.

보급품을 가방에 챙기고 벙커를 나오자, 상쾌한 공기를 마시기도 전에, 저격당했고, 잠에서 깼다. 나름 괜찮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 같았는데, 역시 착각이었다.


청귤차로 목을 축이고 나서

아침부터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읽는 내내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뉘우치기에는 넘긴 페이지가 제법 되었다. 늦잠을 잔 것부터가 문제였다.


자꾸만 되풀이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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