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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Jan 22. 2024

'어제'라는 어색함에 대하여

 10년이 지났고, 오늘 병원 방문에서 치료 종료라는 글자가 진료 기록에 적혔다. 교수님께서 악수를 건네셨다. 나오기 전 큰 절로 새해 복 인사를 드렸다. 오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달리 감사함을 표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자연스럽게 나온 전통적인 예법이었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네, 라고 생각했다. 조금 웃겼지만 큰 절이 교수님의 의사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시길 바랐다. '일의 보람'이 되고 싶었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인간이란 과거를 너무도 쉽게 잊는다. 특히 좋은 기억이 그렇다. 부모님께 전화드려서 소식을 전했다. 좋아하셨다.

 인도 카레를 먹고 싶어서, 이마트에서 인도 카레를 모방한 가루를 사서 집에 왔다. 양파와 버섯을 넣고, 물 대신 우유를 넣었다. 어렸을 때, 아시아 식료품 가게에 가서 샀던 카레 가루엔 우유에 섞라고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산 것은 아니었나 보다. 떡볶이용 떡도 넣었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점심을 이상하게 먹고, 저녁은 만회해야지 라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또 우유를 넣고 말았다. 그새 까먹은 것이다. 만들면서도 어이없었다. 대신 떡볶이용 떡은 전자레인지로 돌려 따로 먹었다. 잘한 선택이었다. 저녁밥에 콩과 견과류, 현미, 찹쌀을 넣은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루가 문제인지, 우유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둘의 조합은 명백한 실패였다.

 만성 안구건조증 때문에 하루에 다섯, 여섯 방울 정도 인공 눈물을 사용한다. 그 덕에 안경에 얼룩진 물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 화장실에 갈 때면, 나오면서 안경을 씻어야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손을 씻을 때는 완전히 잊고 만다. 책상에 앉아서 얼룩을 보고 나서야, 세면대에서 뭘 했어야 했는지, 깨닫는다. 이미 자리에 앉았으니, 다음에 화장실에 갈 일 있으면 그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에 안경을 씻은 적은 거의 없다. 결국 나중에 안경을 닦기 위해서만 화장실에 간다. 물기를 털고 천으로 말끔히 닦으면, 비로소 세상이 깨끗하게 보인다. 자주 챙겨 씻어야지. 그 습관이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AI의 환각 현상(Hallucination)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지하철을 타면서 생각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 아닌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그것도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한다. 그런데 만약 그 사실 정보가 참고한 데이터가 이 세계 데이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을까. 다중 우주가 각자 다르게 보유하고 있는 정보를 AI가 수집했고, 환각 현상(Hallucination)은 하나의 세계에서는 거짓이지만, 다른 하나의 세계에서는 참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AI는 데이터의 웜홀을 내부적으로 구축해 버렸고, 자신의 의지(AI에게 의지가 있다면)와 관계없이 두 세계를 잇는 채널이 된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출발역과 도착역 사이의 시간을 짧게 만들어 준다. 시간은 인간의 발명품인데, 삶은 신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이 문득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어제가 될 테고, 순서 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일은 두서없이 사건을 던져 댈 테다. 삽입된 시간과 기억이, 아마도, 인도 카레를 불완전한 제품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좀 신빙성 있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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