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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행복은 살 수 없지만, 불행은 막을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에 노인들이 자리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번호가 불렸고, 익태는 창구로 갔다.
직원의 설명을 들은 익태는 문서 하단에 정갈한 글씨로 이름을 적고 서명했다. 유의사항은 따로 살피지 않았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한 가지만 확실하면 상관없었다. 죽음에 단 한 푼도 더 쓰고 싶지 않았다. 빠듯하게 살아온 삶이었다. 딸에게 무엇도 주지 못했다. 도덕적 의무감으로 딸이 헛된 돈을 자신에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외동이라서,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매번 했다. 얼마 없는 유산으로 다툴 일이 없을 테니.
상속 문제로 익태는 가족을 잃었다. 함께 나고 자라, 의좋게 지냈지만 돈은 돈이었다. 여유 있는 가정이 없었기에, 모두가 간절했다. 악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형편이 나빴을 뿐이었다. 익태는 큰 형에게 딸 대학 등록금 값만이라도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큰형에게도 아들과 딸이 있었다. 둘도 1,2년이면 차례로 대학에 가야 했다. 큰형을 탓하지 않았다. 탓할 수 있는 대상은 자신이었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지지 못한 죄. 더 나은 집을 구하지 못한 죄. 그건 모두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더 많은 돈을 가지지 못한 죄.
우연한 기회로 사고사를 당해, 사망보험금이라도 두둑하게 챙겨주고 싶었다.
건물을 나오며, 문자를 보냈다.
[바쁘더라도. 저녁은 챙겨 먹어라]
답장은 없었다.
다음날 익태는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8단지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쓰러진 리프트에 깔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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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례는 치르지 않았다. 바로 화장했고, 뼈가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버렸다. 장을 지내지 않아, 이틀을 내리 쉴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마른 낙엽 같은 사람이었다. 살짝 쥐기만 해도 으스러지는. 그런 사람이 세상을 견디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다. 리프트에 깔린 아버지는 완전히 으스러졌다고 했다. 농담 같은 죽음이었다. 산재보험금과 사망보험금이 나왔다. 각각 2360만 원, 2960만 원이었다. 사람 목숨이 8년도 더 된 구축 아파트 전세보증금도 되지 않았다. 지독했다.
월급 세후 250만 원에, 반지하 월세 45만 원, 알뜰폰 요금 2만 원, 인터넷 요금 2만 원, 교통비 7만 원, 식비 20만 원, 학자금 대출 상환금 27만 을 빼면 147만 원이 남았다. 이 중 130만 원을 저축했고, 17만 원을 비상금으로 남겨두었다. 비상금은 경조사비, 병원비 등으로 쉽게 빠져나갔다.
3년 동안 라선은 거지처럼 살며 4680만 원을 저축했다.
여기에 아버지 목숨값을 더하면 딱 1억 원이 나왔다.
자본이 지수적으로 증가하지 않으면, 10년이 지나도 비슷한 삶을 살 것이다. 아버지가 던진 작은 공이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공포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월세와 전세로 전전하다 고독사한다. 부모세대보다 가난해지는 첫 번째 세대라는 프레임이 목을 죄어왔다.
"우리 그만 만날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주 뒤 남자친구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뱉은 말이었다. 라선은 '그래'라고 답했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모자람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모자람 없이 공부했고, 모자람 없는 회사에 다녔다. 몇 번 결혼 얘기가 나왔었다. 라선은 언제나 화제를 돌리거나, 말꼬리를 흐렸다. 남자친구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것도 알았다. 연애는 괜찮지만, 결혼 상대로는 부족한 존재다라고, 라선 스스로도 줄곧 생각해오고 있었다. 그만 만나자는 말 뒷면에 있는 이유들을 들출 용기가 없었다. 예정된 결말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인과를 설명하는 것은 물리법칙이 아니라 '돈'이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건물 입구에 서서 중지와 무명지 사이에 볼펜을 끼워 넣어 담배 피우는 흉내를 냈다. 담배가 공짜였다면, 라선은 골초가 되었을 것이다. 담배가 비싸서 다행이었다. 강제로 폐는 지키게 되었으니. 인생이 지랄 맞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웃기게도,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라고, 정권 때문이라고, 세상을 탓하고 싶었다. 책임 질 자신이 없어서.
아버지가 남긴 유산도 책임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볼펜을 다시 가방에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낮은 천장, 눅눅한 공기. 집이라기보단, 굴에 가까운 보금자리였다. 옷을 갈아입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1억으로 필사의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는데, 저축 말고는 해 본 것이 없었다. 공부해야 한다고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3시간 동안 스터디 글을 읽었다. 기본이 없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불안감에 카페 글 보는 걸 중단하지도 못하고, 집중력 없이 이 글, 저 글을 무의미하게 훑다가 겨우 침대에 누웠다. 두려움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현실을 똑바로 마주 보기엔,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생활력 하나는 강하다는 자부심이 마음속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었는데, 절벽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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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기에, 보고서를 이 따위로 쓰나?"
신 차장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라선은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죄송하면 발전이 있어야지,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똑같잖아."
처음부터 신 차장이 사납게 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라선에게 칭찬만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한 번 라선이 만든 보고 자료로 대표이사 앞에서 크게 까인 이후로, 관계가 일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보고서가 문제일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라선은 보고서 문제이길 바랐다. 보고서는 고쳐 쓰면 된다. 사람은 입맛대로 고칠 수 없다. 그건 라선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IT 기업에서 상황이 나빠지면 가장 먼저 잘리는 직무가 테크니컬 라이터였다. 라선의 글쓰기는, 회사가 꼭 붙잡아야 할 만큼, 탁월하지 않았다. AI로 대체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진짜 탈주 각이지 않아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서 다행이네요."
점심을 같이 먹으며 동료 초율이 말했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다정하기까지 한 초율은 회사에서 라선의 유일한 짝이었다. 초율은 입사 동기로 자신보다 4살 어렸다. 이르게 취업 케이스와 늦게 취업한 케이스라 주변에 비슷한 직위에 비슷한 또래가 없다는 점에서, 묘하게 잘 맞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초율은 이제 회사를 나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입사 때부터 퇴사를 준비했던 초율은 이번 달에 사표를 낼 예정이었다. 아껴 모은 종잣돈으로 여기저기 투자를 해 착실히 자산을 불리고 있다고 지나가는 말을 종종했다. 종잣돈, 종잣돈. 라선은 종잣돈이란 단어를 되뇌었다. 지금 '종잣돈 1억'으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나.
"초율, 하나 물어봐도 돼?"
"그럼요."
"지금 1억 있으면, 뭘 해야 해."
초율이 숟가락을 반쯤 물고 답했다.
"세 가지가 있죠 하나 주식을 한다. 둘 부동산을 한다. 셋 고이 모셔둔다!"
"너라면?"
한참 뜸을 들이다, 초율이 말했다.
"코니랩스 컴퍼니에 투자하겠어요. AI칩으로 완전 핫하거든요."
검색해 보니 경제 기사에서도 오르내리고 있는 유망한 회사였다. 하루를 더 고민한 뒤, 라선은 1억으로 코니랩스 컴퍼니 주식을 매수했다. 초율이 떠나기 전까지 우상향 하고 있던 코니랩스 컴퍼니는 초율이 떠나고 한 달 뒤 기록적인 하락세로 10분의 1토막이 났다. 뉴스에서는 주가 조작 사건을 보도하며, 배후자를 찾기 위해 검찰과 금융당국이 수사에 나섰다고 했다. 전재산의 90%가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질 줄이야. 어이가 없었고, 부끄러웠다.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라선은 걷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주저앉았다. 한강 다리 위에서 한참 동안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한강을 따라 줄지어 세워진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강물의 가장자리를 밝게 비추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부들부들 떨며, 몸을 던졌다. 바람이 세차게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강은 길었다. 다리가 이렇게 높았나. 라선이 의아해하며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라선의 머리채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목이 거의 부러질 것 같았다. 아악. 라선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정신 차려, 뭘 잘했다고 소릴 질러!"
다정한 목소리에, 거친 말투. 단발머리에 검은 피부, 그리고 청색 날개를 단 여자가 라선을 품에 안으며 혼냈다.
경제의 천사 민하였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