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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Mar 03. 2021

자발적 퇴사. 야근하는 워킹맘이 될 뻔했지만.

2화) 아이를 품고 집으로 돌아가다.


"오늘은 내가 야근이라 당신이 애 픽업해주기로 했잖아!
갑자기 회식을 한다 그러면 애는 누가 찾아? 왜 매번 이런 식이야?"......

"엄마, 오늘 이서방이 회식이래요.
미안하지만 엄마가 애 좀 받아줘요... 네.. 네.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게요."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A대리님의 통화내용을 엿들어버렸다.
영업 3팀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 걸 보니,
대리님의 통화를 나만 듣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잠시 후 여직원 휴게실에서 만난 A대리님의 얼굴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위로를 해야 할까 했지만 주제넘은 짓 같아 가만히 마주 앉아 애꿎은 커피잔만 휘휘 돌려댔다. 오히려 대리님은 나와 내 동기를 바라보며 우리의 연애사를 물어왔다.
그러곤 진짜 친언니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결혼할 거면 일찍 해. 그리고 회사는 절대로 그만두지 말고, 애 낳고도 일은 계속하는 게 좋아. 내가 이러는 게 지랄 같아 보여도, 집에서 애 보는 것보다는 여기 나오는 게 훨씬 편해."


그땐 잘 이해되지도 않던 그 말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오랫동안 단단하게 저장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가끔씩 대리님의 그 말이 생각 나는 걸 보면...  


----------------


외국어를 전공한 나는
교수가 되기를 꿈꾸며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석사 과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미의 콜롬비아로 괜찮은 취직자리를 찾아 떠났다.  
정말로 괜찮은 취직자리였는지는 판단하고 싶지 않지만,
논문 통과의 답답함이나 꼬질꼬질하고 가난한 대학원생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엔 최적의 기회였다.


콜롬비아에서 1년을 꼬박 적응하고
간단한 일 정도는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정도가 되자
한국이 그리워졌다.
안정적인 내 나라 내 땅에서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철을 겪으며 출퇴근을 하고, 하루 걸러 한 번씩
상사의 흉을 봐가며 회식자리를 전전하는 친구들의
회사생활을 안타까워하며 띄엄띄엄 전해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런 한국 생활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단한 스펙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스페인어문학과 석사 졸업장과
해외 취업 경험 1년이라는 얇디얇은 경험치를 펄럭이며 입사지원서를 수차례 넣었지만,
매번 서류 심사에서부터 쭉쭉 미끄러졌다.


그러던 어느 날,
33번째로 서류 지원을 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34번째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리고, 살인적인 야근으로 유명한
의류수출회사의 영업 3팀 신입사원으로
첫 입사를 하게 된다.


살인적인 야근이나 업무 강도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 없이 '잘 살아 보세!' 하는 마음 하나만 갖고 입사를 했다.
한두 주쯤 출근을 해 보니 회사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해외에 있는 바이어나, 해외 생산 공장과의 소통을 위해 야근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일이었다.
긴급한 해외발송이나 샘플 작업 지시를 위해 주말 출근도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른 채,
입사한 지 3년이 되던 해에는 아는 선배의 소개로
의류수출 업계에서는 가장 잘 나간다는(?)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된다.
옮겨간 곳에서도 여전히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직 후
한 가지 특별한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사 내에서 인정받는, 과장급 이상의 여직원 분들의 모습이었다. 그분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그 당시 나는 남편과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직장 내에서 여성들의 위치를 조금 더 진지하게 관찰 하기 시작했다.
기라성 같은 여자 선배들을 우러러보며 '나도 저렇게 멋지고 세련되게 성공해야지.'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출산이나 육아에 대해서는 늘 '순리대로'라는 생각을 하며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얼마 후 남편과 나는 결혼을 했고, '순리대로'라는 말을 너무 믿어서인지 결혼을 한 지 딱 한 달이 되던 때에  첫 아이가 들어섰다. '직장여성'이라는 가볍지만 바쁜 타이틀 하나만 가지고 살던 내 인생에 순식간에 '아내'와 '예비맘'이라는 낯설고 무거운 두 개의 타이틀이 추가되었다.


결혼을 했지만, 임신이 된 줄 몰랐던 시기에는
조심해야 할 줄도 몰라서 새벽 한 두시까지 야근을 했고,
임신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넘치는 일을 미룰 수가 없어서
야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들도 다 해내고 있는 그 일을
나 역시 묵묵히 해내며 살아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의류 수출 업의 고된 부분은
잦은 야근,
무거운 원단 실어 나르기,
샘플실 실장님께 잘 보이기,
그리고 바이어 비위 잘 맞추기 등이 있었는데,
임신 중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육체적인 노동은 당연히 고되었고,
정신적인 노동은 그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쓰라렸다.
문득 이전 회사에서 만삭의 몸으로 씩씩하고 싹싹하게 자기 몫을 해치우던 A대리님이 생각났다.
"너희들도 결혼하거든, 일 그만두지 말고 워킹맘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A대리님의 말이 수시로 귓바퀴를 맴돌았다.


하지만 임신 초기를 막 넘어서던 4월의 어느 날
유산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하혈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하루에도 여러 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야근도, 원단 나르기도, 그리고 영업 활동도
더 이상 이어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워킹맘'도 좋았지만,
당장 내 안에서 자라나는 작은 싹을
안전하게 틔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게 한 달여의 고민과
줄줄이 이어지던 상사와의 면담 끝에 퇴사를 결정했다.
난 그저 임신과 출산으로 회사를 잠시 그만두는 것일 뿐,
‘경단녀’의 타이틀을 달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아이를 돌보다가 언제든 원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 꿈은 워킹맘이었으니까...


2013년의 따뜻했던 봄날,
홀가분하게 퇴사 메일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해의 나는,
워킹맘이 되어보기도 전에
육아맘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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