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제발 이번만큼은....!!”
띠띠띠 띠익-
[37.2]
칠흑같이 어두운 밤,
체온계의 당황스럽도록 파란 불빛에 새겨진 반가운 숫자,
37.2도.
불덩이같이 뜨거웠던 내 아이의 몸이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몇 시간째 아이 몸이 닳도록 젖은 수건으로 닦아낸 노력과 해열제의 작용으로 아이의 몸이 차츰 정상 체온을 되찾고 있었다.
정상체온이 단 4-5시간만 지속될지라도
열이 떨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아이가 한차례 앓고 나면 내가 같이 앓고 난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보이지 않는 탯줄의 힘이란 게 이런 건가...
편도염을 자주 앓았던 첫째 아이는
예고도 없이 체온 38.5도를 찍으며
나의 새가슴을 놀라게 하곤 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그것도 내가 온전히 돌보아야 하는 약하고 작은 존재가
아프다는 것이 나름 순식간에 공포로 몰아넣곤 했다.
아이의 체온이 37.5도만 넘어서면 바짝 긴장을 했다.
아이 몸에서 열이 나면 아이가 금방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전국민이 들여다보는 ‘노란색 육아책’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보았다.
그 어디에서도 아이의 체온이 38.5도가 되었을 시
[금방 큰일이 납니다] 라고 쓰인 곳은 없었다.
하지만, 물어볼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초보 엄마는
아이 몸이 조금만 뜨거워져도
체온계를 갖다 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았다.
그때 우리 아이는 이제 막 첫돌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체온계는 38.5도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사흘이 넘도록 비슷한 숫자를 찍어댔다.
그때의 나는
‘차라리 이 아이가 입원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저 혼자서는 이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며 기도했다.
남편이 곁에 있는 저녁시간 이후로는 괜찮았지만,
아이와 단 둘이 있는 시간에 열이 오르면 겁이 덜컥 났다.
나의 간절했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아이는 그날 입원 권유를 받고
인생 첫 환자복을 입게 된다.
아이가 입원한 병원은 아픈 아이를 살려낼 수 있는
천사들이 모여 있는 곳 같았다.
시간마다 나를 대신해 체온을 확인해 주시는 분이 계셨고,
필요할 때면 해열제를 수액에 연결해 주시기도 했다.
아이가 아플 때면
늘 용감해 보이는 친정 엄마가 그리워졌다.
그리고 따뜻한 시부모님의 토닥임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손을 내밀수는 없었다.
시댁은 서울, 친정은 포항.
쉽게 들락거리며 “저 좀 도와주세요!”
할 수 있는 거리나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다.
친정인 포항은 한 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이긴 했지만,
친정부모님은 우리 아이와 동갑인 갓난쟁이 조카를 돌보고 계셨기에 거기에 더 무거운 짐을 올려드릴 수가 없었다.
아이가 입원을 하게 될 때면
사랑 많은 시아버님이 서울에서부터
버선발로 뛰어내려오시긴 했다.
위로가 되었고 감사했지만,
초보 엄마인 나는 언제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의 지속적인 육아 지원이 절실했었다.
아이가 아플 때면 특히 힘들었지만,
아이가 아프지 않을 때도 육아는 수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편과 단둘이서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었기에 같이 울며 웃으며 헤쳐나갔다.
내가 아이를 재우면 남편이 젖병을 씻었고,
내가 씻기면 남편이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에
로션을 발랐다.
내가 요리하면 남편이 유아식을 먹였고,
내가 아이를 재우면 남편은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해치웠다.
두 아이를 키우며
우린 최고의 팀워크를 이뤄냈다.
물론 나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남편이 잘 버텨 주었다.
(잔소리에 굳은살이 벤 남편은 잔소리를 웃음으로 넘겨내는 실력까지 두루 갖추었다.ㅎㅎ)
여전히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내고 있지만,
지난날들을 곰곰이 떠올려보면,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우리 부부를 성장시켰다.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음이
오히려 복이었다.
스스로 날갯짓하는 법을 터득했고,
스스로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법까지 터득했다.
아이들과의 애착을 탄탄하게 형성하는 중이고,
즐거운 일이 생기면
우리 넷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 넷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낮이 밤 같고, 밤이 낮 같았던
강도 높았던 육아의 시기에는
양가의 도움 없이 부부 독박으로 해내는 육아가
말할 수 없이 고되었다.
부모님께 육아 도움을 받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
많이 부럽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막 7-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도움받지 못한 것이 감사하다.
스스로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스스로 서게 되었고,
육아를 하며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배워왔다.
아이들과의 값진 시간을 얻었고,
온전히 부모가 되는 기회를 얻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얼마나 소리를 지를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일지 대충 견적이 나오지만,
부모 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감사하는 엄마로 살기로 결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