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비 온 다음날이라 그런지
갈 곳 잃은 곤충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길,
주차장을 힘겹게 가로지르는 풍뎅이를 만났다.
그냥 지나치려다 말고,
한참이나 풍뎅이를 들여다본다.
그냥 두고 가면 풍뎅이의 생존 능력은 길러질 텐데
혹시나 그 사이에 주차를 하는 차를 만나게 된다면,
그 길로 다시는 풍뎅이가 걷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가던 길을 멈춘다.
반들거리는 풍뎅이의 몸통을 번쩍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근처의 푸른 나무 근처에 착지시킨다.
"꼭 살아남아라, 풍뎅아."
풍뎅이의 안녕을 기원하며 돌아오는 길
나의 마음은
나와 내 아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금세 바뀌었다.
"꼭 살아남아라."
하는 말은
내 아이에게 하는 말이었고,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약 3-4주째 매주 월요일마다
아이는 힘겨운 아침을 맞이 한다.
“엄마, 오늘 딱 하루만 학교에 안 가면 안 될까요?”
패턴은 비슷하다.
“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5교시가 너무 길어요. 선생님도 좀 무서워요.”
“그래 학교에 가기 싫겠다.
그런데 말이야. 원래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시간이 길어지는 거야.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선생님이 늘 무서운 건 아니라고. 어렵겠지만 우리가 적응을 해야 해.”
아이 앞에선 꾸역꾸역 괜찮은 척
표정관리를 하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불바다가 되어있다.
여리디 여린 나는
아이의 힘겨운 말 한마디에
금방 마음이 쓰라리고,
아이의 작은 미소에도
바르르 떨며 금방 꽃웃음을 짓는다.
나는 일희일비하는 엄마이다.
아이가 힘겹게나마 월요일을 보내고
나머지 날들을 기똥차게 잘 살아내는 것을 보면
기특하고 행복한 마음이 마구 솟아난다.
행복을 뛰어넘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쯤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게 되면
일순간 마음이 지옥이 되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엄마 이게 싫어요. 저게 싫어요. 나빠요.”
하는 말들은 어렵게 와 닿지 않는다.
아이가 정말로 이런저런 이유로
무언가를 싫어할 수는 있다.
지극히 정상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부정의 반응은
본질적으로 타고난 모성만으로도 커버가 가능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아이의 부정적 반응은
7년 이상 엄마 노릇을 하고도 쉽게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냥 적응해, 인마!”
“다 그런겨!” 따위의
짧고 단호하며
쿨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엄마라면
참 좋을 텐데,
아직은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
그저
아이가 힘들면 같이 힘들고,
아이가 기쁘면 같이 기쁜,
나는 여전히 연약해 빠진 엄마이다.
지나가는 풍뎅이의 안녕을 기원하듯,
연약한 나의 엄마 라이프도
힘차게 응원하고픈 마음이 든다.
내 마음속에선 아직도 연약한 아기인
우리 아이의 독립심도
온 지구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단단하게 키워주고픈 마음이 든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마음을 가득 쏟아부어야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언젠가는 이 터널에도 끝이 있음을 기억하며
나와 내 아이가
꼭 이겨내기를,
꼭 살아남기를 소망한다.
꼬옥, 살아남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