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말 상자를 채우며.

by 다니엘라


2021년 5월
첫째 아이 아홉 살.
둘째 아이 다섯 살.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때론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이
또 때론 보석 같은 표현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제 말을 배워가고,
이제 막 세상을 배워가는 아이들의 말속에서
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움이 물씬 풍겨온다.


친정 엄마는 가끔씩 나의 어록을 꺼내 이야기하신다.
잘 적어둔 어록이 아니라,
엄마의 기억 저장고에 담아둔 어록이다.
그래서인지 지난해에 들은 이야기와
올해에 들은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엄마의 기억 저장고가 작동되는 만큼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방향은 확연히 달라진다.
하지만 늘 당당하고 씩씩한 편인 엄마는
매번 하시는 말씀에 확신을 갖고 하신다.
“네가 정말 그랬었다니까~”


그런 엄마 덕분에 하고 싶은 작업이 생겼다.
그건 바로
[우리 아이들의 어록을 진짜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
특별해 보이지 않더라도
이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질 것들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애써 기억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워질 수도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다.


뭐든지 글로 옮기는 엄마답게,
아이들의 말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1. 2020년 11월.
첫째 아이는 부모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네 살 난 둘째는 절반은 존댓말 절반은 반말이다.
아이의 존댓말이 일상화된 것은 우리 부부에게는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아이의 말은 이전보다 더 부드럽고 예뻐졌다.


2. 다섯 살이 된 작은아이가
‘아주 많은 것’을 강조해서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풍선 터지게]
“엄마, 나는 그거 풍션 터지게 많이 주쩨요.”
“엄마, 나 너무 풍션 터지게 많이 먹었쪄.배불러.”
“형아 그거는 풍션 터지게 마니 이쪄? 나도 줄 거야?”

풍선 터지게 많다니...
많이 먹었다는 말에 갖다 붙이기에 이만큼 찰떡같은 말이 또 있을까?


3. 아홉 살이 된 큰아이가
엄마 아빠를 껴안아 줄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통화 후 끊을 때,
그리고 부모, 선생님께 편지를 쓸 때
끝머리에 붙이는 말이 있다.
[사랑해요, 축복해요, 소중해요!]
이 말은 아이가 갓 태어난 그 겨울날부터 내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던 말이다.
아이를 보며 진심에서 우러난 그 말을 종종 해 주었다.
“사랑해, 축복해, 소중해!”

이제는 그 말이 아이의 것이 되었다.
아이의 따뜻함을 나타내는 무기가 되었다.
아이는 등굣길에 엄마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한다.
“엄마, 사랑해요! 축복해요! 소중해요!”
백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내 아이의 예쁜 말이다.


4. 다섯 살이 된 작은아이가
[아낀다]는 표현을
시기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을 알아버렸다.

아이가 선교원 ‘호랑이호’(아이의 등하원차량)에서 폴짝 뛰어내린다.
“요한아, 오늘도 잘 지냈어?”
“예에!!”
“요한이 오늘 호랑이호에서 누구 옆에 앉았어?”
(아이는 늘 좋아하는 여자 친구인 ‘예지’ 옆에 앉는 걸 기쁨으로 여겼다.)
“선교원에 갈 때는 지휼이랑 앉았고, 올 때는 안주한이랑 앉았쪄요.”
“어? 왜 오늘은 예지 옆에 안 앉았어?”
“아~ 예지는 아껴야돼셔요.”(되어서요)
?????!!!!
그렇다. 아이는 아낀다는 말을 언제 어떻게 써야 할지 너무도 명확하게 알아버렸다.


5. 여덟 살이었던 첫째 아이가
[최신]이라는 말을 똑떨어지게 사용하는 날이 왔다.

그 날 우리 가족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평소에 가보지 않은 ‘고택’으로의 여행을 해보자며 아이들에게 숙소 후보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첫째 아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우리 이번에는 최신 여행 가면 안 될까요?”
“최신 여행이 어떤 거야?”
“텔레비전도 크고 침대 있는 호텔에 가는 거요.”
아.....
아이가 붙인 ‘최신’이라는 말은 그 순간 쓰기에 딱 좋은,
딱! 떨어지는 말이었다.


아이들을 키운 8년여의 시간 동안
셀 수 없는 보석 같은 표현들을 많이 들어왔지만,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에
대부분의 말들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휴일 아침,
동글거리는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이들의 말 상자를 차곡차곡 채워본다.
다음에는 더 많이 기억해내기를 소망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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