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은 너무 즐거울 뿐이고,
월요일은 두려울 뿐이고.
주말을 신나게 보냈다.
주말 내내 아이의 얼굴엔 햇살이 가득했다.
그랬던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다가오니
아이는 슬슬 걱정거리들을 풀어헤친다.
“엄마, 학교 안 가면 안 되죠?”
아이는 학교에 안 가면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묻는다.
지난번 상담 때 아이의 말처럼,
주말이 너무 즐거워서 평일에 학교에 가는 것이
그렇게 힘든지도 모르겠다.
(주말과 평일 온도차가 너무 큰 듯)
그럼에도 이번 주 월요일에는
12시 40분에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아이를 보냈다.
아침의 밀당도 익숙해지는 건지,
한주가 지나니 지난주만큼 마음이 어렵지는 않다.
그럼에도 자꾸만 드는 생각은,
‘얘는 대체 누굴 닮은 걸까?’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마도
학교에 가기 싫은 적이 있었다.
아이를 통해
완전 무결한 것만 같았던
지난 나의 학교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 반짝 떠올랐다.
‘어쩜 여태 그게 생각나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지역은 고고 비평준화제도를 시행 중이었고,
중학시절 반에서 늘 상위권에 있었던 나는
지역에서 가장 괜찮다는 여고에 진학을 했다.
그 학교의 교복을 입는 것도 기분이 좋았고,
늘 지나가며 바라보던 그 교정을 걷는 것도 참 좋았다.
그리고 매년 고 3의 수능 성패를 예견한다는 목련나무를
매일 바라볼 수 있는 것마저도 흐뭇한 일이었다.
그러나 학교 생활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자 담임 선생님을 만났는데,
생각보다 인정이 넘치는 분은 아니었다.
중학시절 내내 정이 많고 따뜻한 선생님들을
만났던 탓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선생님이었는데도
그 당시에는 1학년 담임 선생님께 정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모인 학교라
학교 공부를 따라가는 것도 새삼 버거웠다.
다들 참 잘했다.
첫 시험 성적을 받고 나서,
학급에서 내가 위치한 등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우리 학교는 시험이 끝나고 나면,
각 교실 뒤편 게시판에 전교 20등까지의
이름과 학반을 공개하는 전통(?)이 있었다.
당연히 거기엔 내 이름이 없었고,
친근했던 친구들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한없이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성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자
동아리 활동으로 부족함을 채우고 싶었다.
방송반에 지원을 했으나,
최종 면접에서 탈락을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찾은 곳은 연극반이었다.
연극반에서는 나름 활발한 활동을 했다.
가을에 공연하는 연극에서는
배역도 하나 맡아서 열연(?)을 했다.
이름도 잊히지 않는 ‘모꼬지’ 연극반 활동은
나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유일하게 정을 붙인 활동이었다.
1년 내내 학교 생활이 편치 않았다.
공부를 해보려고 애를 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빠 차 안에서 수도 없이 눈물을 쏟았다.
‘힘들다’는 말을 수시로 내뱉었다.
하굣길의 나를 맞이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엔 되는대로 떼를 썼던 기억이 남아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입학한 학교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나고 싶었다.
아는 학교도 없었고,
교육과정도 전혀 모르는 미국이었지만,
나는 나름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있었다.
영화에서 봐 온 미국의 자유로워 보이는 학교들을
꿈에 그렸다.
그리고 당시 영어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미국에 가서 영어를 자유롭게 써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꼬마다운 생각이었다.)
예상하셨겠지만,
앞뒤가 안 맞는 그 꿈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엣헴.
그다음으로 생각해 낸 것이,
경기도 안양(더 정확히는 평촌)에 사는
고종사촌 언니들과 나란히 학교를 다니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우물쭈물하다가는
대학도 지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은 인생을 서울 한번 못 올라가 보고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그런 생각까지 했는지...)
정말이지 거의 일 년 내내 부모님을 졸랐다.
지금의 우리 아이처럼 눈물 한번 찍 흘리고는
끝나는 등교거부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부모님을 괴롭혔다.
안양에서 갈 수 있는 고등학교들의 정보를
컴퓨터로 검색해서 정리했고,
자료 수집이 끝난 뒤 부모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일곱 장이었는지, 여덟 장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어마어마하게 긴 편지를 부모님께 드렸다.
정확히 일 년을 버텼다.
정확히 일 년간 부모님 속을 썩였다.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전학을 허락받았다.
그때의 나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라는 말을
중요한 성경구절처럼 외우며 믿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날,
나는 경기도 안양(평촌)으로 전학을 했다.
큰 고모댁에 방을 한 칸 받아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일 년간 부모님을 괴롭혔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요즘 우리 아이를 보며,
그때의 내 모습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엄마 아빠께 사과의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은 그 당시 힘들었지만,
그때 우리 모두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약간은 덜 미안해지는 말씀을 하셨다.
마음이 조각조각 났을 당시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나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그때의 우리 아빠가 그러셨듯,
비슷한 모습으로 지켜봐 주는 남편에게도 위로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나의 마음이 너무 절절하게 떠올라서
지금의 내 아이에게도 작은 위로를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떼쓰고 기댈 수 있는 부모가 있어
한 없이 기대는 아이의 그 마음이 오히려 고맙다.
마음 문을 닫지 않고
부모에게로 향해주는 아이의 그 마음이 고맙다.
이 녀석이 누굴 닮았나 범인을 찾느라
한참이나 마음으로 여러 사람을 꼬집고 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범인은 다름 아닌 나였다.
우리 아이는 딱 나를 닮았다.
그럼에도
약 20여 년 전의 별난 ‘나’ 덕분에
그리고 별난 ‘나’를 잘 참아내고 키워주신 부모님 덕분에
지금의 이 상황이 조금씩 더 이해가 되어진다.
나 닮은 우리 아이도,
그리고 씩씩한 우리 부부도
이 시기를 조금 더 풍요로운 이야기들로 채워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삭아, 오늘도 학교 잘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