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조 작가의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요즘, 다시, 매일,
같이 글을 쓰고 있는 남편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나 어릴 적의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글로 옮겨보자고.
생각보다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는 덧붙인 것 같지만,
잔챙이 같고 어처구니없는
모래알만치 작은 기억의 조각을
그러모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보태는 것은 잊고 말았다.
그랬더니 남편은
1992년에 나온 김현철의 2집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무려)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사랑했던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글감으로 삼고야 말았다.
잔챙이 같고 모래알만치 작은 기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범주의 것들이었지만,
아마추어 같았던
남편의 어린 시절을 함께 짚어 보는 일은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이다.
어- 그런데, 좀 이상하다.
지난번 나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는
고등학교 시절 만우절에 반을 바꿨다고 했었고
본인이 반장이었다는 이야기까지는 했지만,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는 이야긴 따로 하지 않았었는데,
그랬던 거구나. ㅎㅎㅎ
역시 남편의 학창 시절을 읽고 듣는 일은 옛날 옛적 우리 할머니의 “그때는 말이야~”하며 시작되는 옛날이야기보다도 훨씬 재미있다.
자, 그러면 나는 과거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친정에서는 ‘기억력 안 좋은 애’로 통하는 나지만,
가족들에겐 굳이 안 해도 되는
작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내게도 얼마나 많은데,
그걸 모르다니. ㅎㅎ
자, 그럼 기억력 안 좋은 애의 기억을
살짝 들춰 보겠습니다.
유치원 때 이야기.
언니와 두 살 터울인 나는
여섯 살인지 일곱 살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때에,
아무튼 꽤 크고 나서 처음으로 유치원엘 갔다.
우리가 출석하던 교회 소속의 부설 유치원이었다.
상주 유치원.
두 살 터울밖에 나지 않는 언니 덕분인지 때문인지
나는 언니가 입던 색 바랜 원복을 입어야 했다.
너무 자주 빨아서 빳빳함이 다 빠져버린
누글누글해진 노란 유치원 모자는
소풍 때마다 내 머리꼭지에서 늘 따로 놀았다.
쓴 것 같지도 안 쓴 것 같지도 않은 모자 때문에
나는 아직도 유치원 때 찍은 단체사진 보는걸
썩 즐기진 않는다.
상주교회의 정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정원 앞으로 교회 본관 건물이 있었고,
본관 왼쪽으로는 유치원 건물이 있었다.
그 당시 얼굴이 동그란 배순자 선생님과
까만 뿔테 안경의 박은아 선생님은
나를 참 예뻐하셨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두 분 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 선생님 이셨지만,
참 따뜻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월별 생일을 챙겨 주실 때면
생일자는 생일상 앞으로 나가 장래 희망을 말하고
가짜 케이크에 양초를 꽂아야 했다.
모래가 잔뜩 담긴 동그랗고 커다란 소쿠리 같은 것에
동그란 지름 전체에 걸쳐 은박지를 씌워 놓았고,
생일자는 그 은박지 위에 양초를 하나씩 꽂는 거였다.
모래가 촘촘히 자리 잡은 은박지 케이크에 양초를 꽂는 일은
예닐곱 살의 나에겐 삽으로 땅굴을 파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일단 은박지는 뚫었는데,
모래틈으로 양초가 비집고 들어가질 않는다.
게다가 생일을 맞은 이유로
대중 앞에서 장래희망까지 말을 해야 하다니…
연두색 봄빛 투피스를 입은 나는 다리를 베베 꼬았고,
겨우겨우 장래희망을 말하는 데 성공했다.
생일상 한번 받기 힘들다는 생각 비슷한 것을
그때의 나는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어느 겨울날,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아이들 전체에게
아이스크림 모양의 납작하고 알록달록한 지우개를
선물로 나눠 주셨다.
그땐, 지우개 하나에 집착하던 나이였다.
쓰지 않아도 괜히 모아두면 놀잇감이 되는,
모양 지우개가 귀하던 때였다.
‘지우개 선물이라니!’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두 귀를 뚫고 폐부까지 도달한다.
아이들 인원 대비 지우개 하나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자진해서 누군가 한 명이 지우개를
포기해 주기를 바라셨다.
완전한 포기는 아니고,
다른 친구들이 모두 지우개를 받아가는 오늘 말고,
내일 따로 지우개를 받을 사람을 지원받으셨다.
당연히 꼬마들은 까맣고 동그란 눈알만 떼룩떼룩 굴리고 있었고, 착함이 전부였던 나는(혹은 굿보이 콤플렉스에 벌써 중독되었을지 모를 나는) 자신 있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다음 날 지우개를 받았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는 착한 아이구나. 앞으로도 이럴 때 손을 들어야지.’
그리고 유치원 졸업식날은 호되게 아팠다.
열이 올랐고,
내 동그랬던 얼굴은 더 큰 동그라미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졸업식엔 참석했고, 그날의 모든 것은 눈부셨다.
유치원 때의 기억을 살짝 들췄을 뿐인데,
벌써 숨이 콱콱 차오른다.
너무 사소해서 팔랑거리며 날아갈 것 같던 기억의
조각들을 옮겨 적기로 했는데,
결국은 또 사건 위주로 이야기가 돌아간다.
어쩔 수 없는 디테일 쟁이의 습관.
초등학교 때의 기억들도 사건별로 기억하자면,
올해 안에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만 기억나는 대로 몇 가지 나열해 보기로 한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의 노란색 명찰이 아직도 선명한 자국처럼 남아 있다. 노란색의 비닐 코팅된 고무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노란색의 작은 방패 모양의 명찰이었다. 언니가 입학 한 지 2년 만에 나도 같은 방패 명찰을 달고서 표창이라도 받은 듯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름은 자수로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6학년 때까지 오래오래 달고 다녀야지 생각했는데, 5학년 때 포항으로 전학을 하면서 더 이상 앞가슴에 명찰을 다는 일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운동회 때
우리 학년의 특별공연은 우산 무용이었는데,
복장은 하얀색 타이즈에 하얀색 아빠 반팔 메리야스였다.
그때 정말로 아빠 메리야스를 입고 온 친구가 있었다.
U자로 깊게 파인 목부분의 골 때문에
그 친구는 무용 내내 옷자락을 끌어올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친구를 구경하던 나 역시
정신이 없었다.
무용은 어떻게 끝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2학년 때 우리 선생님이셨던 김옥자 선생님의 얼굴은 종이로 접은 것처럼 선이 반듯한 주름이 참 많았다. 참 따뜻한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늘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얼굴의 주름을 세느라 넋이 나가곤 했었다.
2학년 때는 한창 코딱지를 파는 일에 열심을 내곤 했다.
책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종종 코딱지를 팠고,
교회에서 받은 주기도문이 적혀있는 책받침에
열심히 사냥한 코딱지들을 가지런히 붙였다.
가끔 아트가 하고 싶었던 날엔
뒷면에 있는 예수님과 어린양들 그림에 있는
양들의 눈에 코딱지를 정확하게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 많던 내 코딱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3학년 때는 나를 놀렸던 남자아이의 배와 등을 흠씬 두들겨주고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후회는 없었다.
3학년 선생님은 얼굴이 잠자리처럼 생겼었다. 늘 반짝거리고 큰 눈알에 안경까지 쓰셔서 정말 잠자리 같으셨다.
친절하셨지만, 난 한창 할아버지들이 싫은 나이여서 이종균 선생님도 싫었다.
4학년 때는 정길봉 선생님을 ‘달봉아 달봉아 뭐하니~ 달달봉아 달달봉아 뭐하니~’하고 놀렸다가 과학실에 불려 가서 친구 넷이서 벌을 섰던 기억이 있다.
정길봉 선생님의 안경은 커다란 두 개의 물방울처럼 생겼었다. 안경알은 크고 두꺼워서 시원한 얼음이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인지 늘 한번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선생님 잘 계시죠?
하나 둘 적고 보니 학교생활이 참 길었던 것 같다.
겨우겨우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의 기억만 엄선해서 옮겨 적었는데, 아직도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느낌이다.
곧 또 써야지.
그 시절의 내 얼굴을 떠올리며,
기억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르는 일이
생각보다 즐겁게 느껴지는 걸 보니
어릴 적의 날들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밀레니엄 대 예언으로 없어질 줄만 알았던
(꿈만 같은) 2000년대의 지금을 살며,
하루하루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것도
그때 그 시절, 작고 어렸던 내가
한가닥 한가닥 겪어온 삶의 조각들 덕분이다.
고마운 삶의 조각들 덕분에 쓰고, 먹고, 살고 있으니.
가끔은
지난 삶의 조각들을 둘러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